

아무 것도 없는
눈을 떴다. 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장세일의 이름 외에 알아들은 의미는 없었다. 나는 구차하게 변명했다. 생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퇴원 예정일이 세 차례 밀리고 나서야 방 밖으로 나설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날은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병문안을 와 있던 크루 멤버는 많이 울었다. 그 눈을 마주 보고서야 내가 아직 이곳에 발 딛고 서 있음을 알았다.
알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첫날, 눈을 끔벅이며 공간을 가로지르는 빛이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비연속적인 인식이 인지하는 장면은 비연속적이었고 연속하지 않은 매체에는 맥락과 의미가 깃들 수 없다. 그렇게 무기질의 영역에서 하루를 관찰했다. 질량이 없는 아침 햇살이 기울면서 양달을 만들어내고, 점점 붉은 기를 더해가면서,
그렇게 조금씩 돌아오는 연속성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다른 층위를 인식한 이상 영영 연약한 일상, 현실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은 속였지만 이제 내게는 깎아낼 껍데기조차 없다. 그래도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덮어쓰고 있던 껍데기의 일부가 내재화해 견고한 살갗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존만을 바란 치가 얻어낸, 이른바 자생하는 갑주다. 아주 자랑스럽다.
다만 여상한 장면들의 한편에서 한도윤의 환상을 본다.
시야 구석에 잡히는 그는 별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표정은 알아볼 수 없다. 환상임이 확실한데도 이상할 정도로 위화감이나 공포심이 들지 않는 모습이다.
지켜볼 거면 좀 도와주든가.
…….
안 도와줄 거면 가라. 뭐 약 올리냐? 아님 알못이라 놀리고 싶어서?
…….
귀신은 기타 못 만지나? 하 씨, 도움이 안 돼.
뭐가 보여도 이제는 놀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그것의 시선 안에서 밥을 먹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했다. 상태가 괜찮다 싶은 날이면 약간의 희망을 붙들고 책을 펼쳤지만 매번 결과는 같았다. 인간의 비가역성을 저주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고개를 들 때마다 한도윤은 날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러면 기분은 아예 저 바닥으로 처박힌다.
눈깔 그렇게 뜨지 마.
날 그렇게 보지 마.
난 살 거야.
조금 더 절망한 날, 꿈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한도윤을 봤다. 열리지 않는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는 등이다. 그는 정말 절박했고, 문 너머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문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감싸 쥐고 깨어나 한참을 천장만 올려다봤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편두통이 조금 잠잠해져 비척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계적으로 생수병을 꺼내 드는 내 옆에는 어김없이 한도윤이 서 있다.
한도윤.
…….
할 말 있어서 온 거면 말을 해. 다른 데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나만 이렇게 구경하고 있어도 되는 거야?
꿈 때문이었다. 귀신한테 말을 걸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절실함이 무색하게도 한도윤은 반응하지 않았다. 일방향 소통만 되던가? 아니면 역시 환각인가. 그런 거라면 머릿속으로 혼잣말하는 것보다야 대답 없는 게 낫지. 멋대로 결론을 내렸지만 꿈에서의 어떤 감정은 아직 가슴에 얹혀 있다.
그때부터 여지가 있을 때마다 한도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자취하는 사람의 혼잣말이라는 핑계로 자꾸만 말을 했다. 그러나 여지는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나흘간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메시지와 부재중 기록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그걸 처리하느니 그냥 끄고 살지 하며 도로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운도 좋다. 안 봐도 기자거나 기자였고 그게 짜증 나서 핸드폰을 꺼 두었으니 전화 역시 받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내가 근 열흘 동안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하는 거라곤 불확실한 상대를 향한 ‘대화’뿐이라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미쳐 버리리란 예감이 들던 차였기에 선심 쓰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자였다.
적당히 상대하고 끊을 요량이었으나 그는 드물게도 집요했다.
슬슬 짜증이 났다. 나름의 배려를 하겠답시고 ‘트라우마’를 건들 만한 화제는 꺼내지 않는 것에 냅다 끊어버리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 목소리가 더 가라앉는 걸 눈치챘는지 그는 조금 다급해졌고, 그래서 실수를 했다.
실수였다.
……자살했다고?
아닌데. 나한테 나오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살아있었,
…….
꿈속에서 뜨이지조차 않았을 망막에 박힐 정도로 본 장면을 본다. 무너진 무대의 아래에는 잘 벼려진 쇠꼬챙이들이 늘어서 있다. 나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것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거기에 박혀있는 건 장세일이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다시 열리지 않는 문을 본다.
난잡하게 피를 뒤집어쓴 콘크리트 덩어리를 본다.
목을 매달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본다. 어디였을까, 철골? 분장실에도 적당한 행거가 있지만 내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다른 곳을 찾았을 것이다. 역시 매듭을 매기 좋고 성인 남성을 버틸 수 있을 만한 건 철골뿐이다. 그렇다면 뭘로 매었을까. 목을 감쌀 길이의 줄이 있었던가? 무대 근방에 널린 게 전선이니 생각보다 쉬웠을 수도 있다. 자기 옷에 잔뜩 달린 벨트도 쓸만했을 테고, 정 여의치 않다면 넥타이를 빌릴 수도 있었을 테다. 이규혁이 살아있었다면 어림도 없지만 그는 자살했으니 문제없다.
누가 먼저 죽었을까?
이규혁은 왜 죽었을까?
한도윤은 내가 죽였는데, 그는 왜? (이때 한도윤이 먼저 죽었다면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다시 열리지 않는 문을 본다. 이번에는 친절하게도 대사까지 더빙된 채다. 그는 나만은 살리고자 했고, 나는 죽어 버리겠다고 했고, 그는 죽었다. 이로써 범인을 특정할 모든 증거가 갖춰졌다.
그의 환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나 여전히 비슷한 빈도로 나타난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지극한 공포에 떤다. 언젠가 제가 품었던 살의와 비슷할 감정을 생각하면 전율이 일었다.
왜 왔어?
너 보려고.
원망하려고?
…….
왜 말 안 했어?
내가 너 죽인 거 아냐. 너도 알잖아. 봤잖아!
응.
근데 왜 나한테 왔어? 장세일도 안 왔는데 왜 네가?
인하야. 아니야.
너도 살고 싶었잖아.
응.
나 때문에 죽은 거라고 탓하고 싶은 거 아냐? 내가 죽였다고?
아니야.
그럼?
…….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몰라.
인하야.
반년 전 그곳에서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을 상담사에게서 그대로 들었다고 생각한 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나가는 참가자 중 하나, 아니, 우리 중 하나였나? 화자조차 떠오르지 않는 말을 토씨와 뉘앙스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억지로라도 상담사와 연결해 놓은 크루 멤버에게 오늘의 경과를 보내려고 자판을 누르던 중 메시지의 일시가 엉망으로 뒤섞인 것을 보았다. 곧 돌아온 대화록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분명히 있었기에 단순한 기계상의 오류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변화는 극적이었다. 사소하게는 메시지 상의 질문과 답변의 순서가 바뀌었고, 크게는 일의 인과가 뒤섞였다. 없던 일과 있던 일의 구분이 무의미해졌으므로 꿈과 현실과 생각은 이제 같은 선상에서 기능했다.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언니와 생방송 이전 주고받았던 기록들이 당장 어제 있던 일처럼 여겨져도 이젠 소름이 끼치지 않았다. 독대 상황에서 했던 신PD의 대사를 머리가 깨진 그의 입이 말하고 그 장면을 손해 배상 운운하는 WBS 관계자의 얼굴에서 본다. 그 와중에 용케도 장세일만은 끝까지 들이닥치지 않았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 즈음 장세일의 수첩이 발간되었다. 사실 모르겠다. 그 발간 소식이 적힌 기사를 본 것인지, 발간된 책의 내용을 읽은 것인지, 혹은 단편적으로 보았던 메신저 백으로부터 내가 상상해낸 이야기를 본 건지. 아무튼 그의 시체는 정성스레 다듬어져, 혹은 처참하게 뭉개져 세간의 관심 하에 잘 익어 갔다. 모로 봐도 먹음직스러운 부위뿐이었다. 이전의 그가 나를 어떤 수단으로 보았건 그런 건 이제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케어해 줄 거면 스토커도 어떻게 잘 해 보지 그랬어, 무대 위의 내가 말했다. 범죄자에게는 발언권이 없으므로.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거다. 장세일은 사고였을 수 있다. 하지만 한도윤은 확실히 나 때문에 죽었다.
나는 그 벌을 받고 있는 거다. 그도 살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바랐던 것을 빼앗은 대가를 치르는 거다.
감히 껍데기로 진짜 얼굴을 빼앗은 죄를.
제발, 제발 원망해 줘. 제발 욕해 줘.
그러나 내가 친구 삼았던 한도윤은 어떤 영역 안에선 한없이 다정했고, 그래서 나는 어떤 원망도 들을 수 없었다. 장세일도, 한도윤도. 죽은 사람은 있는데 범인은 없다. 범죄자는 없다.
그러면 빼앗긴 죄는 어디로 가나?
설마 네가 가져가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내 죄를 돌려줘. 제발 값을 치르게 해 줘. 이미 잃어버린 얼굴은 되찾지 못해도 좋으니, 제발 네 죽음만은 내게 돌려줘. 그에게 매달리는 날이 늘었고 그가 입을 여는 날은 줄었다.
내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하는 날이 늘기 시작할 때에야 그것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인하야.
…….
너만은 살릴 거야.
그 순간 내 형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나의 윤곽을 어떻게 해도 정형으로 붙잡아 놓을 수가 없다. 어떤 증거도 갖지 못한 나를 이제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나 그것만은 그곳을 마주 보아 주었다. 의미와 관계가 해체된 자리에서 그것은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상냥한 말들을 뇌까리기 시작했다. 인하야. 너는. 너야말로. 너니까. 너라도. 그러나 언젠가의 ‘그’가 그랬듯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은 더는 없었다.
나는 다음으로 뒤집어쓸 것을 찾았음을 문득 깨달았다.
유안 @youan_ga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