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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

얇은 레이스 장갑이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흔한 액세서리는 아니었으나 흘리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물건도 아니니 이규혁은 더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걸쳐둘 만한 장소를 찾았다. 누군가 버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새하얗고 잘 개켜져 있어 주인이 잃어버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주위에 마땅히 둘만 한 곳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문 옆 본래 있던 자리에서 오십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맨바닥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더 늦장 부릴 여유 없는 일정이 있었고 전날에도 온종일 바빴기 때문에 이규혁은 기묘한 분실물과 하필 그것이 제집 문 앞에 있었던 것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어제는 수를 세기에도 벅차 킬로그램 단위로 양을 따져야 할 것 같았던 정장 수십 벌을 갈아입었고 오늘은 화장품과 향수 몇십 개를 손에 들거나 바르거나 뿌리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온갖 향을 등에 지고 돌아왔을 때 그 장갑은 사라졌다. 이규혁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손수건과 가죽으로 된 시곗줄이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이규혁은 유례없이 늦잠을 잤던 탓에 약속 상대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부주의하게 문을 밀어젖히고 제대로 닫지도 않은 채 뛰어나갔기 때문에 시계 없는 시곗줄은 아예 눈치채지도 못했고 신발에 알 수 없게 들러붙은 천 조각만을 알아차렸다. 신발 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그것에는 로션이 끈적하게 먹여져 있고 각종 향수 향이 섞여 고약한 향기를 풍긴다. 그냥 질 나쁜 장난 또는 쓰레기 무단 투기로 여긴 이규혁은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녹음실에서 메이킹 필름을 찍는 동안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는 스텝들은 쓰시던 향수가 바뀌었냐는 질문과 검은 셔츠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번갈아 가며 뱉었다.

 

커프스 링크와 검은 솔리드 셔츠가 떨어져 있었다.

 

세 번 일어난 일은 일회성이라 보기 어렵다. 셔츠는 누군가 흘리고 갔다고 보기는 어려운 물건이다. 그러나 예민하게 굴 만한 문제도 못 된다. 이규혁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젖혔다. 어제 입은 셔츠는 아직 세탁소에 맡기기 전으로 따로 옷걸이에 잘 걸려 있다. 다시 집 앞을 향했다. 여전히 검은 셔츠는 구겨진 채 발밑에 놓여 있다. 악질 사생팬이나 스토커의 질 나쁜 장난이리라.

 

신고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경고문 같은 것 붙여보면 어때요?

주위에 CCTV는 없어요?

 

대강 사정을 털어놓으면 화장용 붓이나 브러시를 든 손들은 다양한 조언을 건넸다. 다 일리가 있으며 취해볼 만한 방법들이었기에 이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죄다 내키지는 않았다. 일이 커지면 피곤할 것 같은 불길함, 굳이 건드리지 않으면 귀찮은 일로 번지지는 않을 텐데. 달리 무언가를 하기에는 귀가 이후 너무 피곤했고 몸을 덮고 있는 옷가지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은 아침 일찍 나서고 밤늦게 돌아오는 데에만 급급했다. 문 앞에 쌓이는 천 구백팔십사 그램의 의복 같은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화감도 없는 하루하루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오렌지 주스가 쏟아진 흰색 면티와 검은색 슬랙스와 회색 캐시미어 카디건이 떨어져 있었다.

 

이규혁은 밖으로 나간 적 없었고 입었던 것과 너무 닮은 옷들은 문 앞에 개켜져 있다. 각이 잡힌 겉옷을 들어 올리면 사용감 있는 내의까지 가지런히 접힌 채다. 식은땀이 흘렀다. 문을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구니에서 아직 세탁 돌리지 않은 옷가지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누군가 훔친 것은 아니다. 얼룩은 보았던 것과 같은 형태를 한다. 악질적인 누군가 입은 옷을 그대로 갖다 놓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재현했다고 하기에는 집요할 정도로 동일하다.

 

이규혁은 CCTV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규혁이 머무는 곳만 시야를 벗어난다. 기기 고장, 손으로 가린 렌즈, 정전, 불 꺼짐. 옷이 쌓여 있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옷가지를 금고에 넣어 두었다. 사비를 들여 안쪽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노력이 우습다는 듯 찍히는 것은 없고 문 앞에 쌓이는 것들은 나날이 무거워진다. 감색 코트와 베이지색 조끼와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 보온 내의와 양복바지, 양말, 코 부분에 긁힌 자국이 생긴 갈색 구두…….

 

검은 재킷과 검은 넥타이와 검은 바지와 흰 와이셔츠 세 벌이 떨어져 있었다.

 

밖에서 잠을 지새우고 막 현관 앞에 선 참이었다. 제 몸 위에 덮인 검은 천을 더듬었다. 눈앞에 놓인 검은 천을 보았다. 사실 이것은 전부 꿈이지 않을까? 자고 일어난 직후에만 남아있는 환각으로 이규혁에게 입혀지는 옷은 어디로 간 적도 누군가 집요하게 벗겨낸 적도 없다. 그러나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삼 킬로그램 이백이십칠 그램의 의복은 챙기려 드는 족족 사라진다. 미쳐가는 것인가? 어째서 옷으로 인해?

 

검은 롱패딩과 하늘색과 흰색 스프라이트 셔츠와 초콜릿 색 모직 니트와 검은 기모 바지와 방한용 장갑과 쥐색 목도리가 떨어져 있었다.

 

신고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챙기고 전화를 걸기 직전 왼쪽 손에 들린 바구니가 너무 가벼워졌을 때 이규혁은 제 몸을 천 쪼가리를 챙겼던 좁은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검은 긴 팔 면티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막 입었다 벗은 형태로 마치 사람 형태로 서 있다가 문을 연 순간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이규혁은 문을 닫았다. 이규혁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긴 팔 면티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가 떨어져 있었다.

 

문 긁는 소리가 들렸으나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은 온기 없이 차갑고 눅눅하다.

 

검은 긴 팔 면티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뿐으로

 

껍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안감에 묻어난 물고기 비늘이 발치에 후드득 떨어졌고 출렁거리는 근육과 뼈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복도에 긴 궤적을 남긴다. 안과 밖을 뒤집고 꼬아 꿰매어 손톱으로 다듬어야 하는데, 껍질과 손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손날로 훑어내고 털고 씻고 안쪽의 살만 남을 때까지 얇게 떠내야 해. 덮을 수 있도록 등선을 가르고 실밥을 뜯고 가지런히 안감과 겉감을 번갈아 말아놓는 중 묻어나는 비늘은 전부 삼켜야 한다 그들이 비롯된 곳으로 가도록 혀에 유독 들러붙는 것을 여섯 번 씹어 넘기고 무두질 빗질 건조 후 단추를 모두 뗍니다 카라에 회색 천 덧대어진 재킷 손질은 끝났다. 푸른 넥타이는 다시 돌려 묶어 껍질을 덩어리로 스트라이프 셔츠는 잘게 썰어서 속을 채우고 구두로 입을 막으면

 

이규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손 위에 잘 개켜진 옷가지는 어느새 제 것이 아니다. 태워버리고자 함은 불가항력이다. 부엌으로 가 식칼을 찾아서 옷을 조각내고 가스 밸브를 열고 옷을 조각내고 레버를 돌리고 옷을 조각내고 전부 불꽃 위에 올렸다.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이윽고 옷이 아닌 이규혁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아직도 그래요?

지금은 별일 없어요?

 

이규혁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 현관 앞에 기분 나쁜 물건이 떨어져 있는 일은 없고 그것이 이규혁이 전날 입었던 것을 재현한 옷가지인 일은 더더욱 없다. 평소와 같이 얼굴에 화장품을 칠하고 몸에 잘 맞는 셔츠를 걸치고 한쪽 머리를 쓸어올리고 무대 위로 나섰다. 이날 코디는 전에도 이야기 나누었던 꾸밈 담당들이 신중하게 골라준 것으로 깃에 회색 포인트가 들어간 검은 정장 재킷과 스트라이프 셔츠와 십자가 모양이 달린 핀과 푸른색 넥타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나누고 대답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지러이 널린 조명 기구 사이를 지났다.

 

얇은 가죽 장갑이 콘크리트 밑에 떨어져 있었다.

 

흔한 액세서리는 아니었으나 흘리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물건도 아니니 보지 못한 척하세요. 이규혁은 더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걸쳐둘 만한 장소를 찾았다. 누군가 버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새하얗고 잘 개켜져 있었으니 주인이 잃어버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주위에 마땅히 둘만 한 곳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내리쳐야 하므로 핏자국 자리에서 이십오 킬로그램 정도 떨어진 유리 바닥에 그것을 던졌다.

 

더 늦장 부릴 여유 없는 일정이 있었고 온종일 바빴기 때문에 이규혁은 기묘한 분실물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수를 세기에도 벅차 분 단위로 양을 따져야 할 것 같았던 가스 수십 통이 지하를 지난다. 화장품과 향수 몇십 개를 손에 들거나 바르거나 뿌리면서 사진을 찍는다. 냄새가 나지 않도록. 온갖 향을 등에 지고 다시 무대에 올랐을 때 그 장갑은 사라졌다.

 

가죽으로 된 시곗줄이 타일 위에 떨어져 있었다.

 

이규혁은 유례없이 늦장을 부렸던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 옆에 일 자로 서 있는 문장 부호 같은 것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부주의하게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은 채 뛰어나갔기 때문에 시계 없는 시곗줄은 아예 눈치채지도 못했고 신발에 알 수 없게 들러붙은 핏조각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고약한 향기를 풍기는데 대체로 죄의 악취다. 그냥 질 나쁜 장난으로 여긴 이규혁은 기억이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감출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는 손들이 이마에 튀긴 핏방울을 닦아주면서 손에 묻은 검은 얼룩이 참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번갈아 가며 뱉었다.

 

커프스 링크와 은테 안경이 떨어져 있었다.

 

세 번 일어난 일은 일회성이라 보기 어렵다.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세 번부터는 우발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됨은 입 달린 우발적 인간이 제일 잘 알 것이다. 벨트는 누군가 흘리고 갔다고 보기는 어려운 물건이다. 그러나 예민하게 굴 만한 문제도 못 된다. 이규혁은 옷장을 열어젖혔다. 어제 입은 껍데기도 그제 입은 껍데기도 태어나면서 입은 것까지 옷걸이에 잘 걸려 있다. 다시 앞을 향했다. 여전히 명함은 구겨진 채 발밑에 놓여 있다.

 

마땅히 네가 해야 해?

주위에 아무도 없어?

 

손들은 다양한 유혹을 이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건드리지 않았어야 하는 일을 꺼낸 당신의 탓이다. 그러나 죄다 내키지는 않았다 아예 침묵하기에는 몸을 덮고 있는 껍질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죄책감 대신 삼킨 고양감은 혀를 무두질한다. 그렇게 쌓이는 227,783시간 분량의 의복 같은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화감도 없는 반복

 

뛰어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이 집요할 정도로 동일한 것은 당연하게도 재현이기 때문이다.

 

이규혁이 머무는 곳만 시야를 벗어난다. 고장, 손, 정전, 불 꺼짐. 무시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러나 누구도 숨통을 끊을 면허는 없으므로 이규혁이 빚진 목숨 세 개 분량의 자격은 그의 껍질 전부 합친 것보다 무겁다.

 

검은 재킷과 검은 넥타이와 검은 바지와 흰 와이셔츠 세 벌이 떨어져 있었다. 목을 세 바퀴 반 감을 수 있는 질량 그렇기 때문에 너는 상복을 입을 자격 없다.

 

어째서 옷으로 인해? 꾸며진 껍질을 비웃는 손들이 겉모습을 뒤덮는다 애초에 그것뿐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안쪽은 온기 없이 차갑고 눅눅하다.

 

지느러미로 뒤덮인 횟감처럼 차가운 손 위에 누워 벗겨지기를 기다린다 제 것인 옷가지를 안으로 아무것도 없는 안쪽을 밖으로 덩어리를 손질해 반은 꺼내고 반은 집어넣는다 비장을 건드려 덜 녹은 목소리가 묻지 않도록 신중하게 남아야 할 것만 남을 수 있도록

 

이윽고 옷이 아닌 이규혁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서 네 껍데기를 몸뚱이 안에 쑤셔 넣도록 해. 눈을 가리고 입을 꿰매고 귀를 막도록 하십시오 죽음을 본 것도 죄를 말한 것도 용서를 들은 것도 무용하므로. 받아들인다면 불타 죽을 것이요 외면한다면 가라앉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손들 사라진 자리에 잘 갈무리된 비늘이 떨어져 있다.

너는 묻혀 썩을 자격 없으므로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송진 @rosin_p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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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5 <Revenant> |  wix edited by @bs_ex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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