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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모른 척 넘어가니까 좋았어? 사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이규혁이 살인했다는 거.

***

무대가 무너진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잔해에 맞은 육체적 트라우마와 붕괴한 무대에 갇혔다 탈출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모두 치료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등에 가득한 멍 때문에 제대로 눕지도 못했다. 아물어가는 상처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저리듯 아파져 오는 걸 참지 못해 방금 감은 새 붕대를 풀었다 감았다 반복하기도 했다. 불 꺼진 어두운 병실에 홀로 남아있자니 고요와 어둠이 나의 숨을 조여왔다. 한동안 나의 병실은 불 꺼지는 일이 없었다. 켜진 방에서 자지도 눕지도 못하는 채 눈만 뜨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어지러이 자리 잡았다. 그 장소에서 느꼈던 위화감, 단서, 사건에 대한 모든 진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엄습하는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진실이라는 땅에 짧게나마 발 디뎠음을 느낀 탓이다. 매듭짓지 못한 실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PD님, 혜성이, 세일이, … 나와 규혁이 형의 숨통마저 조여버릴 굵은 밧줄이다. 안돼. 이 이상 이어지면 반드시 무너진다. 내가 지키려 했던 현실은 가벼운 깨달음 하나만 있어도 쉬이 사라지고 마는 덧없는 신기루였을 뿐임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묻었다. 당장이고 튀어나오려는 모든 문장을 삼켜 땅에 숨겼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높은 울타리를 쌓았고, … 거기에 진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건 내가 만든 지옥이리라. 아마 평생, 안고 살아갈…….

 

그 순간 들린 음성이었다.

 

모른 척 넘어가니까 좋았어? 사실 너도…….

“.......”

순간, 어지럽게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텅 빈 방, 아무도 없는 여기에, 진실을 입에 담는 무언가가 있다.

 

귓가를 타고 들어온 그것이 뇌를 거쳐 온몸으로 퍼진다. 너는 진실이 무서워 숨기고 도망쳤겠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어. 숨겨놓았던 땅이 밑바닥까지 파헤쳐지고, 너는 네가 숨겼던 죄의 파도에 삼켜 증발하고 말 거야. 모르는 척 감았던 눈이 뜨이면… 너는 죽은 이들의 목숨까지 배신한 셈이네? 배신자. 배신자!

 

이미 늦은 것이다.

***

헉, 하는 소리가 폐부를 자극해 곧장 두 눈 굴린다. 방금 뭐였지? 심장을 꿰뚫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고여있던 숨을 모조리 뱉자 겨우 깨닫는다. 아, 병실이구나. 숨을 몰아치며 당황한 기색 역력한 내 거동이 심상찮았는지,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규혁이 형이 곧장 침대 앞까지 다가가 안부 묻고 만다.

“도윤아, 잘 잤어? … 혹시, 악몽이라도 꾼 거야?”

무대 붕괴 이후, 형은 내 곁에 머물렀다. 저처럼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거니와 이번 사건이 그에게 주는 정신적 영향 또한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동료가 죽고 본인마저 죽을 뻔했는데, 그런 일을 겪은 사람 치곤 너무나 의연했다. 그저 언제나 한결같은 단정함으로, 이전의 통찰력을 잃어버린 환자의 편이 되어, … 옆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겠지. … 그리 추측할 뿐이었다.

“아, 아니야. 그냥…….”

우물거리며 대답을 미루자, 그의 눈매가 휘었다가 이내 고운 미소로 이어졌다. 내게 무언가 숨기려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제스처이자, 알면서도 넘어가 주겠다는 선언이었다. 배고파? 과일 깎아줄까? 다정하며 간결한 문장.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목소리 너머엔 차마 숨기지 못한 환희가 가득 묻어있고, 검게 물든 갈빛 눈에도 맹목적인 감정이 새겨져 있다는 걸. 맑았던 친애가 어쩌다 이런 감정으로 변모한 걸까? 그래, 그 일 때문이야. 무대가 붕괴되었던, 한 달 전의….

***

엇갈림의 시작은 분명 무대 붕괴 이후부터였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나부터가 그랬다. 구조된 직후의 나는,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죽은 이를 본 충격인지, 끝끝내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 고통으로 인한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나의 정신이 그리 온전치 못했다는 것이다. 협찬받은 옷은 찢어지고 해져 곳곳에 먼지가 묻었으나, 그것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붉은빛은 먼지에 가려지지 않고 더 진해져 있었다. 얼굴, 팔, 다리, 등, 배, 속에 든 살덩어리, 정신……. 나를 이루는 모든 것에서 피가 솟구쳐나오는 광경은 끔찍했다. 머리를 맞지 않아 목숨 정도는 건졌다지만, 언제나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그 아슬함이 규혁이 형을 변하게 했던 건 아닐까.

 

규혁이 형은 내게 제 가정사마저 털어놓았었기에, 모순이 있다는 건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세간이 아는 이규혁과 진짜 이규혁은 달랐다. 규혁이 형은 학대 속에서 자랐다. 학대받은 몸과 마음은 올바른 성장을 방해했고, 결국 뒤틀린 어른이 되게 만들었다. 단정한 껍데기 뒤집어쓰고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건 임시방편이었을 뿐 결여된 과거를 채워주지는 못했기에, ... 슬슬 한계였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규혁이 형은 어떻게든 노력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하니까. 그게 어머니를 향한 속죄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 그러나 무대 붕괴 이후, 그는 속죄마저 포기했다. 제가 간신히 지키고 있었던 모든 허물을 던져버린 것이다. 한번 시작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고, 이규혁은 그렇게 선을 넘었다.

***

정말 그게 확실해?

노이즈 잔뜩 낀 목소리에 흠칫 놀라자, 내 생각을 읽은 듯 소름 끼치는 비웃음이 뒤를 이었다. 멍청한 한도윤.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목소리에 눈썹이 아래로 내려간다. 진정된 줄 알았던 생각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 토할 것 같아. 다시 주변을 둘러보면, 규혁이 형이 사과를 깎고 있었다. 형이 한 말인가? 아니면,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는 입을 열었다.

"...... 규혁이 형,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응? 과일 깎아주겠다고 한 거? 왜, 사과는 싫어? 저번엔 잘 먹었잖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아무것도 아냐.”

나의 대답에 형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예쁘게 잘린 사과를 하나 내밀었다. 단정하게 깎인 사과를 깨물자 달큰한 과육이 새어 나왔다. 사과는 아주 달았고 시원했지만, 속은 씁쓸하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규혁이 형이 뱉은 문장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방금 목소리는… 뭐였지?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오히려 형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도윤아, 너 괜찮아? 상태 안 좋아 보여. 분명 곧 퇴원할 수 있다고, … 들었는데.”

주저하는 듯 끊기는 목소리엔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입원하는 내내 그랬다. 조금만 인상 찌푸려도 바로 눈꼬리 내리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칠 정도로 크게 반응하곤 했다. 지나친 과보호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의 호의만큼은 부담스러웠다. 가끔은 구역질이 일기도 했고, 그 섬뜩한 시선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 무섭기만 했다. 공포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서 시작되었고,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또다시 무대다. 나는 아직도 무대 아래에 있다. 모든 문제는 무대에서 시작되었고, 무대에서 끝났어야 했지만, … 끝내지 못한 고통은 지금도 무대 밖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 형. … 오늘은 이만 가줄래?”

순간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얼핏 생각했던 본심이다. 숨기는 일에 특화된 나는 쉽게 털어놓지 않으며, 침묵으로 모든 질문에 답변하곤 했다. 모든 문장을 숨겨 담아놓는 감정의 무덤은 넓고 깊어서, 무수히 많은 비석이 세워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숨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실패한 원인은 터무니없다. 내가 본심을 말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숨겨놓은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 목 전체를 장악하고 뇌에 도달한 순간, 나는 생각을 멈췄다.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해. 그건 분명한 부추김,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내 싸늘한 요구를 들은 규혁이 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형은 늘 그랬다. 내가 당신을 밀어내는 모든 순간이 불안하다는 듯 굴었다. 애꿎은 손만 만지작대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자꾸 움츠러든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도, 그는 내가 뱉은 문장에 상처받았다고 시위하는 듯,

“... 미안. 혹시… 방해된 걸까?”

… 우울에 잠긴 작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네가 없으면 금방 부서져 버리는 몸이라고.

나는 형의 애원을 알면서도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확실한 거절 의사다. 나처럼 모순적인 인간이 또 있을까?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면서도, 속에 담긴 마음을 알면서도, … 너무나 간단하게 버려버린다. 무대에서 형은 내게 진실을 밝혀달라 애원했고, 나는 묵인했다. 이번에도 나는 형을 무시한다. 규혁이 형의 감정을 짓밟는 일도 이젠 익숙했다. 알겠다고 끄덕이며 나가는 형의 뒷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

형이 완전히 사라짐을 확인한 뒤, 나는 내가 느꼈던 기시감에 집중했다. 구조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신과 상담을 몇 번 받았었다. 사고를 겪은 이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상담 결과, 나는 아주 멀쩡했고, 다만 조금의 죄책감에 눌려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환청 따위를 들을 시기는 한참 지났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방금의 문장이 환청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에, 새삼 미치기라도 했다는 걸까?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나는 왜 형을 곁에 두지 못했을까.

지직거리는 소음에 아까까지 꺼져있던 TV를 돌아보자, 언제 켜졌는지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리드 스타즈 붕괴 현장에서 총 3명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사고사로 판명되었으나, 일각에서는 다른 의견도 제시되는 상황입니다만, 무대 붕괴 당시 안에 있던 추가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기에 살인이라는 가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 달 전 봤던 뉴스의 어느 구절, 처음 이 뉴스를 접했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출 직후, 잔해에 깔린 후유증으로 붕대와 반창고로 잔뜩 무장한 나를 규혁이 형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치료가 이게 고작이냐고 화내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형의 존재를 실감하며 쓰러지듯 잠들었다. 깨어났을 땐 노을 진 저녁이었고, 그동안 자지 않고 옆에서 날 간호한듯한 형을 응시한 채 TV를 틀었다. 마침 뉴스에서 떠들던 내용도 베스타였고, …… 구출된 뒤 처음 들은 무대 소식은 충격이었다. 살인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고, 흘긋 쳐다본 규혁이 형은, 

웃고 있었다.

 

베리드 스타즈 붕괴 현장에서 총 3명이….

계속 반복되는 뉴스가 속을 울렁이게 했다. 한 달 전 뉴스가 켜지도 않은 TV에서 흘러나온다. 리모컨을 찾아봤지만 시야에 보이지 않았고,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가 어쩐지 서늘하다.

 

증언했어야 했어, 그렇지?

 

다시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

“... 뭐야, 누구야…?”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TV가 뚝 꺼지며 소음이 사라진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될 무렵, 병실이 점점 좁아지더니 내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 막혀오는 숨. 잔해에 깔렸을 때 느꼈던 무력감이 발목을 잡는다. 방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나는 고립된 방에서 공포감을 느낀다. 급히 의사를 호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 청력을 유린하는 조소가 귓가에 스친다.

한도윤, 언제까지 배신할 거야?

그 목소리는 죽은 신 PD님의 것과 닮은 말투에, 한때 삶을 함께했던 동료의 것과 같은 어조였으며, 나 자신의 목소리와 같았다. 이제 그만 현실을 봐. 알고 있잖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소리뿐이던 것은 서서히 형태를 갖기 시작하더니,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을 쥐어뜯는다. 실체 없는 손이 말한다. 한도윤…. 그제야 입이 열렸고, 나는 드디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다만 대화를 시작한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고, 우리의 이야기는 분명,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불량품이리라.

“... 너는 나야?”

그것은 분명 내 목소리를 들었지만, 아무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공포에 입술이 바짝 말라, 꾹 짓누른 아랫입술이 까칠했다. 너는 몰라. 네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꿈틀댄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소리 내 외칠 순 없었다.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고, 기억해. 생각해. 나는 눈을 감는다. 한도윤, 네가 진실을 숨겼어. 진실이라는 단어에 몸 전체가 움찔 떨린다. 그것의 목소리는 마치 나 스스로가 뱉는 고해처럼 깊고 절박하다. 슬픔과 거짓, 증오가 섞여 엇갈린 본심이 긍정한다.

내가 숨겼어.

“... 하지만 뭐가 문제인 건데? 규혁이 형도, 나도 둘 다 행복해. 그거면 된 거야. 그거면 된 거라고.”

내린 시선 사이로 뱉은 단호함은 익숙한 먼지 냄새에 막혀 무로 돌아간다. 내 앞까지 들이닥친 벽이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천장이 바닥으로, 바닥이 천장으로 변하는 일련의 과정 이후, 병실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깨지고 망가져 내동댕이쳐진다. 그것은 작은 재앙이자,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어느덧 무너진 무대로 돌아간 나는 또 다른 나를 마주했다. 되풀이되는 그 날 있었던 상황이 행복했던 지난 한 달을 모조리 부정해버렸다.

***

한도윤의 형상을 한 과거의 망령은 무대로 돌아가기 직전이었고, 모두와 함께 있었다. PD님, 혜성이, 세일이. 죽은 이들에게서 보였던 찰나의 기시감. 단서는 충분했고, 나는 모든 걸 목격했다. 살아남은 모두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구조대도 곧 진입할 것이다. 무대는 무너졌지만 내가 설 자리는 남아있었고, 나는 모두를 밟고 올라가 1위를 향해,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아니야. 이건, … 이건 아니야….”

비틀거리는 모습, 당황하는 얼굴. 뒷걸음치는 모습. 잠깐 뱉은 탄식. 당당하던 태도는 머잖아 증발했다. 망령은 무너졌고, 내가 손을 내밀자, 과거의 망령은 내가 되었다. 환상은 찰나였으나 감정은 길게 남았다. 네가 모두를 땅에 묻은 거야. 배신자. 얼굴 없는 이의 절규가 내 손에 피를 묻힌다. 어깨에 올라간 손, 가득한 한기가 텅 빈 속마음을 대변한다. 왜 무대에 있는 건지, 방금 본 내 모습, 죽은 사람들, 무수히 많은 손에 대한 질문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나는 그들에게 빠져들었다.

 

“나는 나를 잘 알아. 너도 나를 잘 알고, 진실을 감당하기 무서웠던 거야.”

나는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듯 익숙한 대사를 뱉는다. 방어적인 태도가 우스웠던 걸까? 사라진 줄 알았던 망령이 다시 나타나 나를 본다. 세상이 나를 본다. 규혁이 형의 차가운 시선, 흐르는 눈물이 애처롭다.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나는 손을 뻗었다. 형의 손이 피로 물들어 있었으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규혁이 형이 내 손을 맞잡는다. 내 손도 붉게 물든다. 이래서야 마치, 공범 같잖아. 그는 입을 연다.

알면서 왜 모른 척한 거야? 도윤아, 나는 네가 나를 잡아줬으면 했어. 내가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네가 나를 도와주길 원했어. 결국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도윤아.

바닥에 놓인 시체에 손이 없다. 형이 나를 원망한다. 죽은 이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세상이 나를 본다. 나는 규혁이 형의 마지막 애원마저 무시했다. 숨이 막힌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다. 여기는 텅 비었다. 규혁이 형이 범인이다. 침착한 심장은 멋대로 날뛰는 일 없이 고요하다.

네 본심은 뭐야? 그것이 묻는다. 나는 내가 편하면, 그걸로 충분해. … 무엇보다, 형을 살인자로 몬 ë°°ì‹ ìžë¡œëŠ” ë³´ì´ê³  ì‹¶ì§€ ì•Šê±°ë“ .

 

아,
너무 간단하게, 모든 걸 알아버렸다.

***

…….

… 잠에서 겨우 깨어난 것 같다. 폐소공포증도, 환청도, 꿈도 없다. 그저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이 세상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지?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이마저 꿈인가? 꿈에서 본 내용은? 창문 밖 세상은 어둑한 새벽이다. 머잖아 해가 뜨면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깨어나,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울고 화내며 즐기겠지. 하지만 나만큼은 그럴 수 없다. 나의 평화는 깨졌다. 다시 붙이기 위해 본드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아주 강력해 모두의 손발을 붙여버릴 것이다. 타인이 불행해지면 나는 행복해진다.

생각이 이상하게 튀고 있다.

나는 정말, 하라는 대로 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알량한 욕심으로 밴드를 버렸다. 머리를 자르고 이미지를 연기하고 주는 곡을 부르며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그리하면 분명 밝은 길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무대, 규혁이 형, 살인, 망각, 연옥…….

한도윤.

그것이 내 옆에서 말을 건다.

어떻게 생각해? 네가 무시한 모든 것들. 나는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왜, 그렇잖아. 본선은 진출하고 싶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무서워. 그래서 PD님의 지원을 받았지. … 모든 야유를 무시하고, 사랑하는 이의 시선만 보고 달려온 무대에서 나는 밑바닥까지 깔렸어. 네가 구한 사람이, 모두를 죽였어.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하지 않았어. 아는 척하지도 않았지.

규혁이 형을 죽이면 ìš©ì„œí•  ê±°ì•¼?

…….

 

세상이 어둠으로 물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처럼, 서서히 나를 삼키고 있다. 무겁고 무서운 죄악이다.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야. 두서없는 문장을 자아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 파도에 휩쓸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어둠에 잠식된 채면 다시 어디론가 향할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제어할 수 없다. 그것이 내 숨결을 대신하고 있다.

… 날이 밝자 어김없이 규혁이 형이 찾아왔다.

***

규혁이 형은 다정하게 내 곁에 앉았다. 삐걱대는 침대가 위태로웠다. 말해. 죽은 이의 영혼이 말을 건다. 규혁이 형이 들고 온 사과에 시선이 꽂힌다. 추모조차 하지 않았겠지.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영원한 비밀을 위해 죽이고 죽였지만 나만큼은 가만히 둔 사람. 그 자비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고 말았다. 규혁이 형은 제정신이 아님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오늘은 좀 괜찮아? 네 상태가 악화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어. 너마저 곁을 떠난다면, 나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통 감을 잡지 못했을 거야….”

“...... 그게… 할 말이야?”

규혁이 형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건 지독하게 엮인 인과관계라는 걸, 형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형의 살인을 눈치챘음을 알 거야. 목격자를 없애는 방법도, 형은 알고 있다. 나를 죽이면 되는 거야. 형이 나를 죽일까? 이번엔 어떻게 죽이지? 넥타이? 제 손으로? 의료사고를 흉내 내서? 심장 박동이 울린다. 쿵, 쿵, 쿵….

“... 도윤아. 너 혹시….”

“살인자. 더러운… 인간말종. 그거, 형이지.”

한층 내려간 형의 목소리는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네게 내 모든 걸 알려줬어. 너는 날 잘 알잖아…. 어째서 의심하는 거야…? 나를 겨냥한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큰해, 당장 품에 안겨도 된다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포식자의 유혹은 으레 그런 법이다. 발톱을 숨기고, 눈빛을 내리고, 안전하리라 판단한 작은 소동물이 안기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버리는. 내가 미동도 할 수 없던 까닭이다. 손이 나를 붙잡고 있다. 수틀리면 영혼부터 모든 게 조각날 것이다.

이규혁은 살인자니까.

“내가 혹시 실수했어? 도윤아, 네가 내게 의심을 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 아하하... 혹시, 알려줄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려간 눈매, 슬쩍 웃는 입꼬리. 다정히 질문 건네는 형의 단정함은 한도윤에서 시작하고 한도윤에서 끝난다. 모든 노력의 종착지가 나였다. 텅 비어있던 그에게 기어이 삶의 의미 부여해준, 웃으며 손잡아주던 나의 작은 결의가 기꺼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었겠지. 정말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 형의 웃는 얼굴이, 슬퍼하는 표정이 두려우니까. 내가 언제 형을 배신할지 확신할 수 없어서.

“… 도윤아, 요즘의 너는, 너답지 않아. …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순간, 규혁이 형의 나른한 눈빛이 묘한 빛을 풍긴 것도 같았다. 선을 넘은 자 특유의 분위기에 공기가 비릿하게 물들다 멈추었다. 그가 나의 어깨에 조심스레, 예의 다정함 잃지 않은 채 손을 올린다. 따뜻한 온기 닿자마자 전신이 흠칫 떨린다. 서늘하다. 시체를 만지는 것처럼 딱딱하고 괴상한 감촉이다. 나는 다시 떨기 시작한다. 규혁이 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 찢어질 듯 큰 웃음만 나를 반긴다. 나는 더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다.

“...... 마, 만지지 마.”

“도윤아.”

“맞잖아…. 응? 내 말, 틀려? 형이잖아. 나, 내가, 그럼 이제 나도 죽는 거야… 내가……. 죽여줘…….”

… 규혁이 형의 눈썹이 올라갔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빛. 스스로 숨긴 모든 치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낸 사람. 끝의 끝까지 의심하고 고찰하던 두뇌는 구출된 이후에도 변치 않았을 것이고, 생각을 거듭하는 뇌는 결국 알아내고 말았을 거다. 나의 선택과 진실, 정의 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에 오답도 정답도 아닌 답변을 기재했다는 걸. 내가 도망쳤다는 것, 범인을 알면서도 숨겼던 것. 모두 괜찮다.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끌어안은 나는, 정말 괜찮은 상태일까? 지금도 봐.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이 텅 비었잖아. 내 안에 있는 건 나를 울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잔뜩 격양된 감정만 불러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이렇게 추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이렇게 한심하지 않아. 나는 내가 아니야.

 

… 그럼 나는, 한도윤인가?

 

“...... 미안, 미안해…. 내가 미친 것 같아, 형. 다 끝난 일이잖아. 근데 왜 나는… 왜 이제서야……. … 잊어줘. … 제발…….”

머리를 감싸며 신음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도, 규혁이 형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반창고와 붕대를 모두 풀고 그곳을 긁는다. 손톱에 피가 가득 맺혀도 계속 긁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전신이 상처로 물들면, 따끔거리는 아픔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급하게 달려온 의사가 손을 결박하는 와중에도 나는 웃는다. 울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

그것과 함께한 모든 이가 곱게 미치는 건 아니지만, 더럽게 미치는 것도 아니다. 배신자, 방관자, 위선자. 나에 대한 혐오감이 피어올랐다. 공기가 스치는 모든 부분이 가렵다. 나는 손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우웩, 헛구역질 몇 번에 눈물이 맺힌다.

“배신은 내 탓이 아니야. 살인을 묵인한 것도 내 탓이 아니야. 정말 잘못한 건 내가 아니야.”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불안감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처음부터 베스타에 출연하는 게 아니었다. 최고의 자리는 이미 정해졌고, 최고를 데려가는 여정의 장애물들. 그중 하나가 내 배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하던 자기최면은 이번에도 주효했고, 덕분에 나는 짜고 치는 판임을 알면서도 최고가 될 실낱같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도윤.

그것이 손을 흔들고 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달콤한 말이었지만, 천장을 응시하는 눈에는 초점이 없다. 진실을 밝힐 수 있어. 내가 후회하는 모든 게 거기 있어. 그러니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나를 미워하는 인간의 싹을 뽑아버리고, 정신 차리지 못하는 인간은 죽여버리면 돼.

모두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인간이 되는 거야.

악마의 속삭임, 줄곧 뒤를 따라다니던 환청. 거짓마저 모두 현실인 세계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범인을 잡고, 질 나쁜 범죄를 잔뜩 해치운 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배신자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른 호칭을 만들면 되는 거야. 나를 욕하는 이의 손을 잘라다가 바치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돌아가기 위해선 무대로 돌아가야 한다.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내 모습, 나는 나의 밝음을 사랑한다. 잠깐의 잡음으로 고생했지만, 이젠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해? 가면 알아. 서서히 강해져 가는 환청에 의사가 물어오는 소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나의 위치도 분간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 있어?”

여기 있어.

천장이 열리더니 무수히 많은 손이 내려와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무대가 바로 여기야. 손이 나를 부르고, 피가 터지면, 천장이 무너져 나는 다시 갇혀버린다. 아무도 없는 무대 아래에서, 나를 부른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니까.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내가 땅에 섰는지, 떴는지조차 모른다. 의식이 차츰 사라져간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가 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말을 건다.

 

모른 척 넘어가니까 좋았어? 사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이규혁이 살인했다는 거.

***

어느 날 도윤이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만히 앉아있던 어느 병원의 1인실에서도, 고독이 눌러앉은 본인의 집에서도 그 어떠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관계와의 연락을 단절한 채, 그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실종을 흥미롭게 여긴 기자가 적어낸 기사 한 줄로 한도윤은 다시금 페이터의 희생양이 되었고, 결국 사지가 조각났다.


“... 도윤아, 정말 이게 네가 원했던 거야?”

이제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병실, 나는 병원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쩌면 내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도윤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는 건 나밖에 없었잖아. 뭘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었을까. 같이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면 안 됐던 걸까? 늦은 후회와 절망이 몸을 뚫었다. 짙게 흐르는 무력감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

 

너는 소중한 모든 것을 전부 잃어버릴 운명이로구나.

 

쨍강.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생경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다. 귓가를 타고 들어온 그것이 뇌를 거쳐 온몸으로 퍼진다. 숨겨놓았던 땅이 밑바닥까지 파헤쳐지고, 모르는 척 감았던 눈이 뜨이면…

 

이미 늦은 것이다.

***

↕지니어스 님이 공유하신 글입니다.
WBS 뉴스 @WBS_News
<속보> 베스타 시즌 4 출연자로 이름을 알린 한도윤이 실종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는 11월 10일 오전 2시경 돌연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병원 관계자는 CCTV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지니어스 @genie_earth
한도윤은 무인도 떨어져도 혼자 살아남을 놈인데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밴드 안된다 싶으니 컨셉 바꾸고 솔로 데뷔 노린 전적부터 화려한데 죽었네 사네 갑론을박 그만 좀 했으면 좋겠음.

한완용척살단 @im_suchafool
끝까지 애쓴다 한도윤

마스크끼고레이드 @glolyone
실종이라고? 제발 무사해요 도윤님

추첨탈락한_커피 @6F4E37cat
실종이라는데 괜찮은 건가 ㅠㅠ

Woosuk_hur @hmin_msq
@BS_handy 야
@BS_handy 뒤졌냐?
@BS_handy 지 좋을 대로 튀더니 끝까지 마음대로다 이거지 좆같은 배신자 새끼

정글펭귄군 @junglepenguin
한도윤 드디어 죽었넼ㅋㅋㅋㅋㅋㅋ

PlugHole @PlugHole0810
@BS_handy 왜 연락 안 받아 걱정되게

 

 


 

리스 @141235882|규혁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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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5 <Revenant> |  wix edited by @bs_ex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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