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오늘부터 다시 미아의 연속
트루+히든엔딩 이후, 하수창과 한도윤의 이야기
w.K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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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지 않은 상처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나 혼자서 주인공인 세상의 한 가운데서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스테이지 위에서
Hello, 안녕, 나는 여기에.
[https://youtu.be/rOU4YiuaxAM]
***
“냉장고에 뭐 이렇게 들어 있는 게 많냐.”
“다 받은 거예요. 인하가 올 때마다 뭘 자꾸 들고 와서.”
“먹으라고 주신 거 아냐, 그럼 먹지 그랬어.”
“인하가 사 오는 속도를 못 따라가서 그래요, 먹는다고 먹은 건데. 형 주스 마시고 싶으면 안에 있는 거 마셔도 돼요.”
“하나라도 없어져야 짐이 줄지 않겠냐. 하나 마신다.”
“두 개 마셔도 돼요.”
“그러지 그럼.”
하수창은 자신이 마실 생각으로 꺼냈던 주스 병을 잠시 내려두고, 새로운 병을 열어 침대에 앉아있는 한도윤에게 건넸다.
“자, 두 개. 너도 한잔해.”
“한 잔은 무슨…”
“왜, 건배하는 거지. 너의 퇴원을 축하하면서.”
“…”
“한동안 술 못 마시잖아. 대충 이런 거로 기분만 내.”
그렇게 하수창은 한도윤의 병에 자신의 병을 부딪치면서 짠- 하는 소리를 입으로 냈다. 얼떨결에 마실 생각이 없었던 한도윤도 이에 화답하듯 주스 병을 가져다 댔다. 오늘이 하수창의 말 대로 축하할 만한 날이라면, 어차피 이를 면대면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도 하수창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한도윤의 이런 대화는 하수창과만 가능했다.
“냉장고는 내가 퇴원 수속 다녀와서 정리할게.”
하수창은 일어나며 자기가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는 한도윤을 말렸다.
“깁스한 애가 냉장고 앞에 어떻게 쪼그려 앉아.”
“아…”
“손 닿는 곳들만 정리하고 있어, 무리하지 말고.”
한 모금 마신 주스 병을 들고 병실을 사르륵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도윤은 생각했다. ‘그 어떤 관계도 아닌 나에게 당신이 도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플러그홀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처럼, 지금도 이렇게 서슴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몇 번이고 물어봤던 질문이지만 하수창은 말끔하게 납득 가능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병실에서 홀로 눈을 떴을 때, ‘오, 일어났냐, 밥 먹어라.’ 같은 말을 했을 때도, 급하게 사람이 필요했던 순간에 일을 제치고 와주었을 때도, 한도윤은 같은 질문을 했었지만 말이다. 한도윤은 그런 말들을 던졌을 때마다 하수창이 했던, 예컨대 '조력자의 역할이 원래 그런 거야', 같은 말로 두루뭉술하게 상황을 넘겼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
“안전벨트 맵시다.”
맵시다~ 맵시다~ 를 메아리처럼 새된 소리로 말하며 손을 뻗던 하수창을 살짝 저지하며 한도윤은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아까부터 자꾸 혼자 힘으로 못할 것 같은 거에서 고집부리시네요, 한도윤씨. 너 깁스했다니까?”
“… 그럼 이것만 좀 도와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마마.”
호칭.
“표정 무섭다, 얼굴 풀어. 알았어 알았어, 마마라고 안부를게.”
아무래도 감출 수 없었던 모양. 한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던 미간을 풀었다.
“이런 건 그냥 내가 도와줘도 괜찮아. 너는 이거 말고도 앞으로 혼자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잖아. 진실을 알아버린 사람의 숙명 같은 거지.”
내비게이션에 한도윤 집의 주소를 입력하며 하수창은 말했다.
“그러니까 넌 오늘부터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몸인 동시에,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존재가 된 거잖냐.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네 일을 생각해. 안전벨트 매고 냉장고 정리하는 것쯤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
“… 왜 도와주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지, 지금.”
“잘 아시네요.”
몇 번이고 들었던 질문을 다시 목도한 하수창은 자동차 핸들을 손가락으로 따닥따닥 두드리며 할 말을 골랐다.
***
“트릭스터라는 말 알아?”
“...”
"모른다고 알아들을게. 트릭스터, 질서를 깨고 장난을 치는 스토리 속의 인물."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한도윤을 한 번 바라본 후, 하수창은 차에 시동을 걸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비트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원래의 흐름을 깨고 완전히 다른 판국을 가져오는 거지. 잔머리 최고, 장난기 최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에게 도움을 준다, 뭐 그런 거?"
"좋은건 다 가져다 붙였잖아요, 그거."
“고오-맙습니다."
왜 고마워하는 건데, 생각하며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도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하수창은, 살짝 웃음을 흘렸다.
"안경쯤이 좋겠다."
"안경이 왜요."
"그 왜, 마스코트 같은 거. 디즈니 영화 보면 트릭스터 캐릭터들이 사람 아닌 걸로 등장해서 옆에 떠다니고 그러거든. 인어공주에 그 갈매기나 알라딘에 양탄자 같은 애들."
"그런 영화 좋아하나 봐요?"
"수연이가 좋아해, 옆에서 보다보니까 도사 다 됐지."
이름을 외우지 말라고 얘기했던 건 하수창 본인이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해놓고도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사이가 된 것도 꽤 됐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형을 마스코트로 만든다면 안경이 된다는 거겠네요. 페이터 프사도 안경이었으니까, 잘 어울리네요."
"그치? 막 이제 다들 그럴걸, 안경만 봐도 '와! 플러그홀!' 하는 거지."
"그건 좀... 안경 쓴 사람이 세상에 형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야, 갈매기랑 양탄자도 그거만 있는 게 아니다?. 마스코트라는 게 그런 거야. 네가 장담한다, 안경 보고 다들 그렇게 말할 거야. 나중에는 트리에 그것만 달려 있어도 알아볼 거라고.”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그 트릭스터랑 형이 나를 도와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야, 트릭스터 캐릭터들이 조력자의 포지션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주인공의 성장을 돕게 되거든.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다. ”
당연하게도, 됐을 리가 없다.
“트릭스터인 내가 너를 도와주는 조력자라고. 그게 내가 네 곁에 있는 이유라고.”
“그러니까 형이 마스코트고, 그래서 나를 도와준다고요?”
“응. 여전히 모르겠어?”
“…네. 그런데 그건 알 것 같아요.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수창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참, 노파심에 말하는데,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건 자발적인 행동이야.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라는 거야. 왜냐면 이건, 그러니까, 음, 애프터 엔딩이거든.”
“앞부분은 알겠는데 뒷부분은 모르겠네요.”
“앞부분 이해했으면 됐어.”
***
차는 어느새 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한도윤은 여전히 뜻 모를 하수창의 말을 곱씹으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과, 이에 섞인 온도 낮은 가을 향기에 한도윤은 눈을 감았다.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하수창은 바람 소리를 뚫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청소?”
“바람직하네, 그다음은?”
“글쎄요, 가서 생각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천천히 해. 시간은 많이 있잖아.”
그래, 앞으로 한도윤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흐르다 못해 넘치는 시간을 주워 담아, 그것으로 다시 세상을 일구어갈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기에. 한도윤은 생각했다. 무너진 무대 안에서 보았던 죽음과, 삶과, 또 진실들을. 살아남은 자로서 본인이 헤쳐나가야 할 앞으로의 일들을.
베리드스타즈4와는 다르게 이제 앞으로의 일은 모두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 그야 당연하다, 인생은 TV 프로그램이 아니고, 연출도, PD도, 스태프도 전부 자신이니까. 말하자면 이건 미아와 같은 상태였다. 누구도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지 않는 백지와도 같은 상태에서 한도윤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미아이기에 절망스러운가? 그렇다 하던들 어떻게 할 수 있으랴. 그저 눈앞의 일들을 해치워나가면서 하나씩 해결하면 된다, 간단하게도. 시간은 많으니까. 미아는 결국 자신의 집을 찾는것 처럼, 한도윤도 그렇게 길을 찾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바빠질 것이다. 살아남은 배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 눈을 떠봐. 너는 강한 사람이니까
그 눈이 봤기에 모든 것이 태어났고
선택한 색으로 칠한 이 세상 안에서
한도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무릅쓰고 눈을 떴다. 차가운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겨낼만 했고, 이 나름대로도 좋았다. 얼굴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한도윤은 말했다.
“네, 저 시간 많아요, 남는 게 시간이잖아요.”
***
“짐 진짜 적네, 인하씨가 사다 준 먹을 것들만 빼면 뭐, 이건 한 보따리로도 정리되겠는데.”
“많아서 뭐 해요, 어차피 집에 올 건데. 병원에서는 먹고 자기만 하면 되잖아요.”
“…똑똑한데?”
“이런 걸 가지고…”
“방금 부끄러워한 거야?”
“아니거든요!”
한도윤의 조촐한 짐을 집 앞에 옮겨주기까지 한 하수창은 별안간 높아지는 한도윤의 목소리에 작게 웃으며 한도윤의 등을 두드렸다.
“퇴원 축하하고. 종종 연락하고.”
“네 형, 고마웠어요.”
“그래, 몸 좀 괜찮아지면 밥 한 끼 먹자. 아, 이런 말 하면 앞으로 영영 못 먹을 수도 있는데.”
“왜요?”
“한국인들 특징이잖아, 다시 안 볼 것 같은 사람한테나 밥 한 끼 먹자는 소리 하는 거. 그러니까… 음… 한 이 주일 정도 있다가 보자. 밥 먹자. 괜찮지?”
“네, 좋아요.”
“그래, 간다.”
등을 돌려 발걸음을 떼려는 하수창에게 한도윤은 물었다.
“형, 물어볼 게 있는데요.”
“말해보십시오.”
“아이 진짜 말투… 음, 아까 형이 트릭스터라고 했잖아요?”
“스토리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 형이 트릭스터면, 그럼 나는 무슨 인물이에요?”
하수창은 그렇게 묻는 한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은 세상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 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너는 당연히 주인공이지!”
소리를 내지른 주인공,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끝날 때 까지 계속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그러니, 이제 죽은 척도 의미가 없는거야
Hello, 안녕, 나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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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게임의 일부분이었으며, 한도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메타 수창이와, 이를 모르는 한도윤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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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엔딩 속의 한도윤은 결국 살아남았고,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스커레이드와의 관계, 베스타 출연진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앞으로 음악가로서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들까지요. 방송에 나갔던 사람이기에 날것의 본인을 마주하는 데에 있어 두려움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한도윤 옆에 오래 있어 수창이가 있어주지 않겠나, 그런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조력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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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7가지 캐릭터 유형 분석에서 출발했습니다. 트릭스터 캐릭터는 장난꾸러기이지만 스토리에 극적인 기능을 가져오는 캐릭터로서, 최후의 순간에 극적인 촉매가 된다… 라고 보글러는 말하는데요. 하수창이 이에 딱 부합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는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합니다(저의 분석에 따르면요). 그리고 트릭스터 수창이는 엔딩 이후에도 계속 한도윤을 도와줄거라고 생각합니다. Q&A에서도 잘 지낼거라고 말했고… 하수창이 오케이 살아 나왔으니까 끝! 하고 잘라낼 사람은 못되는것 같아서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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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중간중간 들어가는 문구들은 BUMP OF CHICKEN의 노래 ‘Hello,world!’에서 발췌했습니다. 다시금 세상에 인사하고 새 발걸음을 내딛는 히든 엔딩의 한도윤을… 응원해주고 싶었다네요. 도윤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