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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B루트 이후, 한도윤의 이야기

​w. 피닉스

 

 

* 트루엔딩 및 후일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베스타 시즌 4 생방송 무대 붕괴 사고가 있었던 후로 1달 반이 지났다. 한도윤은 붕괴 당시 몇 분 동안 매몰됐었다. 그 때문에 몸 상태가 성하지는 않았다. 6시간을 구조대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어찌저찌 버텼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구조대 헬기에 타기 직전에 몸이 무너져내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한도윤이 깬 것은 그로부터 만 하루 뒤였다.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육체적으로도 많이 무리했던 탓에 깊게 잠들어버렸다. 후에 한도윤의 병실에 찾아온 의사가 구체적으로 몸 어디가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인지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의사가 짚어준 부위를 들을 때마다 그곳이 아린 기분이 들었다. 긴 이야기 끝에, 의사는 한도윤이 6주 정도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말했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것인지 생각난 한도윤은 의사에게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내 질문을 했다. 민주영, 오인하, 장세일도 일단 병원에 입원해 있지만 모두 경상이어서 얼마 안 있어 퇴원할 것이며, 머리를 다쳤던 서혜성은 2~3주 입원할 것이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한도윤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모두 퇴원했고, 저마다 각자 다른 소식이 다른 곳에서 알려졌다.

민주영의 베스타 시즌 5 참가 소식을 TV로 확인했으며, 한도윤은 화면 속에서도 빛나는 민주영을 보며 마음속으로 그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응원했다. 민주영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리라.

오인하는 마지막 인터뷰가 나온 뒤로는 공식적인 소식이 끊겼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다더라, 하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얼핏 보았다. 그마저도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이런 소식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서혜성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환자복 차림 상태로도, 퇴원하고 나서도 종종 한도윤이 있는 병실에 찾아왔다. 서혜성이 한도윤에게 결심을 고백하고 나서 며칠 뒤, TV와 인터넷에서는 서혜성의 발언으로 인한 파문이 크게 일어났다. 한도윤은 잠시 그 소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회피했다.

장세일은 퇴원 직후 한도윤에게 담담하게 경찰에 자백할 예정이고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해달라 부탁한 뒤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온 것은 도윤이 입원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장세일은 절망스러운 소식을 갖고 왔고, 한도윤에게 이 사실을 토로하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한도윤은 대답을 해 줄 수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장세일이 페이터에 그 내용을 고백했다는 것은 며칠 후에 알게 됐다.

*

캄캄한 병실 속, 한도윤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종종 꾸는 악몽이 생각났다. 한도윤이 이규혁을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조금 더 빨랐더라면, 아니.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었더라면.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이규혁이 한도윤에게 큰 짐을 억지로 떠넘긴 것 때문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도윤은 이규혁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죽었어야만 했는지. 꼭 이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한도윤이 근 한 달 동안 쭉 고민해왔었던 것이지만,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

한도윤은 어떻게든 정자세로 눕고 눈을 감았다. 이규혁이 한도윤에게만 남겼던 유서 내용이 아른거렸다. 한도윤은 그 내용 덕분에 이규혁이 무엇을 했는지, 왜 그리 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규혁의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이규혁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유서에도 단편적인 내용만 나열됐을 뿐이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결이 다른 문제였다. 뒤척이던 한도윤은 결국 새벽이 깊어졌을 즈음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다시 시간이 흘러, 한도윤은 6주간의 입원을 마치고 드디어 퇴원했다. 입원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찾아온 기자들의 질문에 대부분 침묵해 흥미를 잃게 된 탓인지 한도윤의 퇴원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밟고 밖으로 나가는 중, 팬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한도윤에게 찾아왔다. 한도윤은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팬과 기자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도윤은 쓸쓸함을 느꼈다.

그때, 한도윤의 스마트폰에 문자가 왔다. 민주영의 문자였다. [오늘이 퇴원하는 날이라며? 퇴원 축하해~ 퇴원 직접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본선 준비 합숙 기간이라… ㅜㅠ 나중에 만나면 내가 쏠게.] 민주영다워 보이는 문자를 보자 한도윤의 입꼬리가 조금은 올라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민주영이 오지 못할 것은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최근 베스타 시즌 5 방영분에서 민주영의 본선 진출 확정 소식을 보았기 때문이다. 본선에 진출하면 진출자끼리 합숙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통제가 심해지는 시기. 한도윤 또한 시즌4에 참여했었으니 이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시즌 4에 비해 시즌 5는 정도가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일이었다. 고맙다고, 오디션 힘내라는 말을 붙여 답장을 보냈다.

한도윤은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 외에 와 있는 문자는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스마트폰에 익숙지 않은 한도윤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다가 화면을 잘못 건드려 주소록 앱을 눌렀다. 최상단 즐겨찾기 란에 마스커레이드 멤버들이 있는 게 보였다. 한도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입원하는 동안, 마스커레이드 멤버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허우석과는 당연히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고, 유태희나 김주용은 한도윤의 몸이 회복세에 접어들었을 때 즈음, 조심스레 마스커레이드에 복귀할 생각이 없는지 권유했었다. 한도윤은 끝까지 답장하지 않았고, 이후 그 비슷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한도윤은 마스커레이드는 이대로 끝날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횡단보도 근처에 와 있었다. 한도윤은 보행신호등의 빨간불이 파란불이 되기를 기다리며 도로를 멍하니 보았다. 차들이 쌩하니 지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한도윤은 새삼스레 고독을 느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고독을 느끼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 몇 명이 찾아와 준 덕에 지금 같은 고독을 느끼지는 않았다. 병원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으니,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아보는 사람조차도 없는 것 같아 완전히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독의 일부는 자신이 자초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졌다.

보행신호등이 초록색이 되어 한도윤이 횡단보도에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건너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건너편의 사람은 한도윤을 향해 달려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서혜성이었다. 서혜성은 한도윤에게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살짝 서운하다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와~ 형. 나, 형이 횡단보도에 서 있었을 때부터 형이 있는 거 알아봤는데 내가 아무리 형한테 손을 흔들어도 형은 나 아는 체도 않더라? 내가 그렇게 창피했어?”

“어…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미안, 못 봤어.”

“형이 앞만 보고 있는 거 쭉- 보고 있었거든. 아니면 나 못 알아본 거야? 나같이 튀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형이 퇴원하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나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딱히 앞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 빨리 건너자, 곧 있으면 다시 빨간불 되겠어.”

한도윤의 말을 끝으로 둘은 부랴부랴 횡단보도를 건넜다. 인도에 발을 디디자마자 보행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한도윤은 빨간불을 뒤돌아선 채로 잠깐 보다가 서혜성을 다시 보았다. 한도윤은 서혜성에게 퇴원 축하만 해 주러 왔느냐 물었고, 서혜성은 당연히 아니라며 퇴원 기념으로 소박하게 파티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거창하게는 안 되더라도 술이나 마시면서 노가리라도 까자는 것이었다. 한도윤은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술 먹어도 되나 의문을 가졌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쉬었고 술도 마실 수 있는 상태라며 괜찮을 거라 호언장담을 했다. 결국 거기에 넘어간 한도윤은 승낙해버렸다.

둘은 마실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한도윤은 베스타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마스커레이드 밴드 연습실을 따로 잡아 숙식을 임시로나마 해결하고 있었고, 한도윤만 본선으로 올라온 이후에는 합숙 생활을 했었다. 서울에 한도윤의 집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혜성은 인천이 집이었고, 현재 위치에서 편도만으로도 족히 2시간 30분은 걸리는 곳이었다. 서혜성이 오늘 한도윤을 찾아온 것도, 서울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 처리하고 온 것이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집에서 먹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났기에 식당 같은 곳을 적당히 찾기로 결론이 났을 즈음이었다. 한도윤의 스마트폰에서 벨소리가 났다. 발신인을 확인해보니, 장세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한도윤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습관적으로 말하며 수화기 너머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공백을 뚫고, 조금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이 형. 오늘 퇴원하신다면서요?”

“어, 맞아. 이제 막 퇴원한 참이야. 무슨 일 있어?”

“별 건 아니고요… 시간 있으시면 만나서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알기는 하는데, 딱히 이거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페이터에 뭐라도 글 써서 털어놓고 싶기도 한데, 얼마 전 일이 있어서 페이터는 좀 조심해야 하거든요.”

한도윤은 고민을 하며 눈앞에 있는 서혜성을 보았다. 서혜성도 한도윤을 보고 있었다. 한도윤이 발신자를 확인할 때 같이 본 듯, 서혜성은 작은 목소리로 세일이 뭐라고 하냐며 물어왔다. 한도윤은 만나서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고 통화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서혜성은 한도윤의 의사를 물었고, 한도윤은 솔직하게 고민하는 중이라 말했다. 잠깐 생각하던 서혜성이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세일 집에서 술 마셔도 되냐고 물어봐. 뭐? 혜성아,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누가 들으면 그냥 쳐들어가자는 건 줄 알겠다. 어차피 거절하면 못 가니까, 한 번 권유하기라도 해 봐. 되면 좋은 거고 안 돼도 손해는 없어.

소란스러운 느낌을 감지한 듯, 장세일이 다급히 덧붙였다. 부담을 가질 필요 없다고, 선약이 있다면 편하게 거절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한도윤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서혜성이 제안했던 내용과 그 배경을 장세일에게 전해주었다. 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수화기 너머는 이내 침묵에 빠졌다. 당황한 한도윤이 장세일을 부르려는 찰나, 수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알았어요. 어차피 지금 시간이면 술도 파는 가게는 대부분 문 닫혀 있을 거예요. 누군가의 집에서 먹는 게 더 안전하겠죠. 단, 조건이 있어요. 첫째, 술과 안주는 모두 사 올 것. 둘째, 오늘 발생한 쓰레기는 전부 밖에 가지고 나가 버려줄 것. 셋째, 방음이 엄청 좋은 편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필요 이상의 소란은 자제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분, 술 마시고 나서 갈 데는 있으세요? 아마 서울 내엔 없을 텐데. 어디 숙소에서 묵기도 조금 난감하실 테고. 저희 집에서 한숨 자고 가셔도 되는데, 제발, 제발. 필요 이상으로 어지른다거나 하지 말아주세요.”

한도윤은 장세일의 조건을 서혜성에게 전달했고, 서혜성은 장세일이 수락하긴 했다는 것에 놀랐고 많은 조건에 툴툴댔지만 따지고 보면 너무 큰 조건은 아니었기에 우리를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는 둥 불만을 몇 마디만 내뱉고 수락했다. 장세일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현재 위치에서 30분 걸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다.

한도윤과 서혜성은 장세일 집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맥주 몇 병과 안주를 구매했다. 가게 주인은 둘이 누군지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길 가면 이제 일반인은 아니라는 장세일의 말이 스쳐 지나가듯 떠오른 한도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양손 두둑이 산 그들은 장세일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후, 장세일이 문을 열어주었고 둘의 손을 보았다. 왜 이렇게 많이 샀어요, 타박하듯이 말하면서도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다.

장세일의 집 안은 급하게 정리한 흔적이 있긴 해도 깔끔했다. 서혜성은 거실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 다짜고짜 안주가 들어있는 봉지를 놔두었다. 장세일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살짝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한도윤은 장세일의 눈치를 보며 탁자 근처 바닥에 술이 든 봉지를 살포시 놓았다.

셋은 탁자를 중앙에 놓고 빙 둘러앉았다. 서혜성이 부스럭거리며 안주를 깠고, 한도윤이 벌써 이래도 되나 중얼거리면서도 숟가락으로 맥주병 뚜껑을 시원하고 깔끔하게 땄다. 켜 둔 TV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셋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TV마저 켜져 있지 않았다면 숨 막힐 정도로 엄청난 침묵만이 쭉 이어졌을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뗀 건 서혜성이었다.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화가 난 것이었다. 서혜성은 먹던 잔을 조금 세게 탁자에 놔두었다.

“아이, 씨. 망할 송건욱 이 XX가… 사사건건 내 인생 앞길만 막고. 내가 아주 그냥 호구지? 어? 언제까지 그렇게 기세등등한가 보자.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은 다~ 좋겠어.”

서혜성의 억울함을 모두 알고 있는 한도윤은 아무 말 없이 안주를 씹으며 뉴스를 보았다. 보아하니 지금 뉴스에 나오는 국회의원의 자식이 그 송건욱일 것이다. 하지만 장세일은 서혜성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난리야, 서혜성. 학교폭력 가해자는 그냥 입을 다무시지? 아무리 봐도 억울해 보이는 구석은 없어 보이는구만. 증거도 다 있잖아. 결정적 증거.”

장세일의 시비로 서혜성과 장세일이 말다툼을 한바탕 하기 시작했고, 한도윤은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둘을 말리기에만 바빴다. 서혜성은 억울하다는 말은 했지만, 구체적인 사정은 말하지 않았기에 그 주제는 어영부영 끝났다.

술자리가 다시 침묵으로 채워질 무렵, 뉴스에서는 이규혁 소식이 흘러나왔다. 이규혁. 그 단어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TV를 보았다. 추모 물길을 언급하는 한편, 서혜성의 폭로를 언급하고 있었다. 답답한 듯 서혜성이 잔에 담긴 술을 그대로 원샷하고 세게 내려놓았다. 답답하기는 한도윤도 매한가지였다. 잊으려고 했었던 것, 겨우 잊었던 것이 다시 한도윤의 마음을 어질러놓았다.

“아, 진짜. 이규혁… 규혁이 형. 진짜 책임이라고는 하나도 지지 않고 가 버렸어. 너무하지 않아? 도윤이 형. 그때도 느꼈던 거지만 형은 뭔가 알고 있었잖아. 내가 폭로한다니까 그걸 말할 거냐는 듯한 반응이었잖아. 형. 사실은 규혁이 형이 범인인 거, 알고 있었지?”

장세일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서혜성을 노려보다가 놀란 눈으로 한도윤을 돌아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형, 진짜예요?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도윤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목이 한도윤에게만 집중돼있었다. 둘 다 한도윤이 뭐라도 말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한도윤은 유서 내용과 이규혁을 차례로 떠올렸다.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또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모금을 더 마셨고, 하고자 했던 말은 술과 함께 위장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도윤이 오래 침묵을 유지하자, 서혜성과 장세일은 한도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로 시선교환을 했다. 사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아니었다면 속 시원하게 아니라 말했을 테니까. 그들에게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혜성은 한도윤과 장세일의 컵에 술을 따라주고 곧 자기 잔에도 술을 따랐다.

“형. 어차피 다 끝났어. 날 죽이려 했던 건 규혁이 형이고, 난 이걸 며칠 전에 이미 폭로했어. 세상 사람들이 믿든 말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걸 세상에 알렸고, 모두가 안다는 것이니까. 저 장세일도 알고 있고. 지금 우리 셋만 있는 마당에 뭐가 그렇게 말하기 힘들어. 규혁이 형이 형한테 다 실토했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어?”

한도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유서의 말미에는 이 모든 진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이 쓰여 있었다. 한도윤은 이를 미처 이행할 수 없었다. 장세일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도윤이 형. … 혹시, 규혁이 형이 말해준 것 중에 서혜성이 관련된 것 말고도 더 있었어요? 걔 말대로 지금은 거리낄 게 없을 텐데. 규혁이 형 개인사라던가… 서혜성 너, 규혁이 형 개인사로 협박했었지. 규혁이 형 개인사라면 SCOOP 때 조사한 것도 있으니까 그날 드러났었던 자료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장세일 FD님. 아니, 이제 FD도 아니었던가? 너 요즘 페이터에서 핫하더라? 내부고발, 뭐 그런 거였지? 이런 건 그냥 경찰에다가 말하지, 왜 페이터에서 터트리냐, 페이터에서 이슈몰이하는 건 내 비법이야. 나 따라 하는 거냐?”

“야, 누군 경찰에다가 자수 안 한 줄 아냐!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야, 내가 자료 이것저것 가지고 가서 경찰에 자수했더니 거기서 뭐라는 건 줄 알아? 피해자가 없으니 그냥 집에 돌아가래! 하, 하하… 어이가 없지? 페이터는 최후의 수단이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너처럼 시도 때도 없이 페이터 쓸 생각만 하지 않아.”

“하… 지긋지긋하네. 경찰은 아주 참들 대단해.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권력만 있으면 다 돼. 없는 범죄도 만들어 뒤집어씌우고, 있는 범죄는 없는 것처럼 덮어버려. 이게 장세일이 단독범행이었으면 처벌받았을 텐데, 우리 베스타 관계자 중에 높으신 분이 또 연루된 거지?”

한도윤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화제가 전환된 걸 은근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규혁의 유서에는 서혜성을 죽이려 시도했던 이유와 이규혁의 대략적인 과거사 외에도 신승연 관련 글이 있었다. 지금 이들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혜성과 장세일이기 때문이었다. 서혜성은 신승연과 짧은 교제를 했던 사이였고, 장세일은 신승연과 오래 일한 사이이기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것이다. 한도윤은 둘을 말리지 않고 계속 지켜보았다.

문득, 궁금했던 것이 하나 떠올라 입 밖으로 냈다. 그러고 보니 규혁이 형 말이야. 서두를 떼자, 다시금 둘이 한도윤을 보았다. 납골당에 안치됐었지? 어디에 있어? 서혜성은 김샜다는 얼굴을 했다. 뭐 대단한 거 말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위치는 알아. 나도 며칠 전에 갔었어. 서혜성은 문자로 납골당 위치를 알려주었다.

술자리가 좀 더 길어지고 각자 술이 더 들어가자, 각자 술버릇이 나왔다. 서혜성은 화를 내며 말하기 시작했고, 장세일은 고해성사를 하듯 울며 토로를 하기 시작했다. 한도윤은 맥주병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꽁다리가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대체재였다. 결국 술자리의 끝은 좋지는 않았다.

*

그로부터 며칠 후, 한도윤은 납골당을 찾아갔다. 이규혁의 위치를 확인한 뒤, 찾아보았다. 이규혁의 유골함은 한도윤의 눈높이에 있었다. 한도윤은 근처에 붙여진 이규혁의 사진을 보았다. 생전 당시 무대 위에서 빛나 보였던 그 사진들이었다. 그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규혁이 형.”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던 이규혁 이야기. 아이러니하게도 이규혁의 유골함을 보고 난 뒤에야 말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형. 도대체 왜 그랬어. 왜 나에게 모든 걸 떠넘긴 채로 그대로 죽어버린 거야. 왜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한 거야? 왜, 나를 믿은 거야… 왜 형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린 거야? 도대체 왜 살아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왜 죽음으로 회피한 거야. 비겁하잖아, 형. 잘못했다면 벌을 받아야지. 그게 옳잖아. 혹시, 혜성이가 온전히 깨어난 뒤의 일이 무서웠던 거야? 혜성이가 깨어날 게 그렇게 두려웠어? 혜성이가 뭘 할지 몰라서, 그게 무서워서 그냥 도망쳐버린 거야?”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말할 때마다 작은 의문들이 하나씩 안에서 해결되기 시작했다. 한도윤은 잠시 심호흡한 뒤,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규혁이 형. … 나는 형을 잘 알지 못하고, 형도 날 잘 알지 못해.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동안, 형한테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 그래서, 그래서… 말릴 기회도 없이 떠나버린 것만 같아. 그게 내 죄책감이 됐어. 형이랑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면, 그랬더라면 형을 말릴 수 있었을 텐데. 죽지 않도록 어떻게든 말리고 살아서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붙잡아줬을지도 몰라. 형. 나는, 형이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고 말해줬을 때마다 좋았어.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어. 나는, 나는…”

한도윤의 말은 듣는 이 없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음절로 이어지지 못한 채 입 모양만 뻐끔댔다. 말하는 동안, 한도윤의 시선이 점점 낮아졌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후, 한도윤은 고개를 다시 들어 이규혁의 유골함을 보고 사진을 보았다. 형, 나중에 다시 올게. 하고 싶었던 말 대부분은 했지만, 중요한 말.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말은 여전히 꺼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말. 돌아선 그는 납골당 밖으로 나왔다.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며 서 있었더니, 모르는 사람에게서 퇴원을 축하하는 문자가 왔다. 내용이나 문자 말투를 보니 오인하였다. 퇴원한 지가 언젠데, 소식이 느렸나보네. 그리 생각하며 잠시 서서 답장을 보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할 일이 있다. 한도윤은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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