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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role

​문제편 이후, 오인하의 이야기

​w.녹찻잎

* 약 인하세일 cp 요소가 있습니다.

“그, 좀 어떠세요? 잘 주무셨어요?”

“...잘, 잤겠어요?”

“...하, 하하. 네, 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힘드시겠지만,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인하는 멍하게 눈을 떴다. 더는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어, 억지로 눈을 떴다. 오늘도 맑고 화창하게 떠오른 해가 꼴도 보기 싫었다. 벌써,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여전히 내 기억 속은 끔찍했던 그 날이 또렷했고, 한순간도 잊히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오기 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여전히 손이 떨렸다. 굳게 닫은 분장실의 문을 두드리던 누군가가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지옥에서 구출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병원으로 실려 와서도 정신은 멍했다. 귓가에 울리는 삐, 소리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인실에 입원하고 병실에 혼자 남겨졌고, 그제야 뒤늦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다, 죽어버렸구나. 정말, 나만, 오로지 나만, 살았어? 왜? 어째서? 이, 저주받은 팔에 꽂힌 주삿바늘이 무슨 의미가 있지? 곧 있으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가 알게 될 텐데? 오인하는 먹은 것 따위는 없으면서 올라오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니, 기어갔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바닥을 기어 도착한 화장실은 최악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서혜성의 핏자국이 보이는 듯했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위액을 토해내고는 허억, 허억 힘겹게 숨을 쉬었다. 이 쓸데없이 하얗기만 한 환자복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피로 물든 사람이었다. 피를 조금이라도 씻어보고자 하는 양심도 없는 생각이 원인이었을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잔뜩 깨물고는 울었다. 링거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병실 문을 두드렸고,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소리를 지르다가 기절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둘러쌌다. 상태를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들의 모습에 과거의 내가 겹쳐 보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개자식을 쳐다보던 과거의 내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나를 쳐다보지 마.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손에 집히는 것들을 전부 집어던지며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쳤다. 손에 집히는 게 없어지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벌벌 떨리는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따뜻한 사람의 온기. 그, 온기가 내 목을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의 온기를 가져갔던 것처럼. 손을 뿌리치고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어둠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이제는 빛이 이렇게 무서웠다. 이 빛 아래에는 내가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 같은 건. 그래, 나 같은 건. 그 후, 내 병실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다. 모두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집어던진 베개와 발로 차낸 이불을 전부 수거해가고는 새 베개를 깔아주고, 새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도, 이렇게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누구보다 깨끗하고, 하얗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시간에 맞춰 나오는 식사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먹지 않겠다고 해도 꾸준하게 가져오는 식판을 엎어대기도 여러 번이었다. 몸은 점점 마르고, 신경은 더욱 예민해졌다.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힘이 빠져 넘어지고 다리에 멍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고, 시선이 핑 돌기도 할 때쯤 어쩔 수 없다는 듯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인간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게 내 죄였다. 아무리 괴로워도 몸은 살고자 했다. 결국, 이렇게 죽고 싶어 하는 주제에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수사를 위한 거라며 경찰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얘기할 정신이 되지 못한다고 피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얘기해주면 된다는 말에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왜, 내 얘기가 필요해? 자백이라도 받아야 해서? 기어코, 내 입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인정해야 하니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괴로움이 나를 집어삼킨 지는 오래였다. 더는 이렇게 버틸 수 없었다. 이불을 거둬내고는 TV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TV 리모컨을 잡았다, 놓기를 여러 번. 눈을 질끈 감고 TV를 켰다. 이제는 잊히기를 바랐던 끔찍했던 날의 이야기는 여전히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이제 내 이야기를 해 봐.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이지 실컷 떠들어 봐. 다들 그게 재미있는 거잖아. 안 그래? 나는 그저, 잠깐의 재미에 바쳐질 제물이잖아. 나는 역겹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라고.

 

“현재까지도 붕괴가 이어지는 현장에 결국, 경찰은 수색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아래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 오인하 씨는 회복 중이며, 회복을 마치는 대로 증언을….”

 

저게, 다 무슨 개소리야? 오인하는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리모컨이 떨어지면서 건전지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무도 모른다고. 그, 끔찍했던 아래의 상황을. 오직, 나만 알고 있는 거라고. 나만, 살아 돌아왔으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건전지를 주워 리모컨에 넣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가 볼까 무서워 다급히 TV를 끄고는 리모컨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벽에 얼굴을 기대었다. 차가운 온도가 머리를 깨웠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역겨웠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오인하 씨?”

“네, 네?”

“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네. 그러니까….”

 

경찰이 돌아가고 오인하는 이불을 꽉 쥐었다. 드디어, 끝났다. 모든 게 끝이 났다. 당분간 또, 떠들썩하겠지. 오인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고,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언제 저녁 식사를 두고 갔는지 식판은 옆 탁자에 있었다. 음식이 눈에 들어오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음식을 보기도 싫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문에 비쳐 보이는 내가 괴물처럼 보였다. 시계를 슬쩍 보고는 TV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TV를 틀고 뉴스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2시경 오인하 씨의 증언을 들은 경찰은 공식적으로 수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붕괴가 시작되고, 상황이 점점 악화하면서 모두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오인하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결국, 다들 흩어지면서 오인하 씨는 분장실로 몸을 숨겼고 그 후의 상황은 모르겠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스토커로 알려졌던 故 장세일 씨는….”

 

인간성을 다 버렸다. 범죄자의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아 발악한 결과였다. 양심 따위는 무너진 무대에 전부 버려두고 왔다. 오인하는 다른 소식으로 넘어가는 TV를 껐다.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의 불도 꺼버렸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까지 쳤다. 한 줌의 빛이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빛을 거부했다. 빛 아래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무너지는 이성을 붙잡지 않았다. 이성쯤은 무너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나 끔찍했다. 제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나를 볼 때조차, 과거의 내가 보였다. 나는 이런 시선을 받아 마땅했다. 이게 내가 감당해야 했을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얘기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나는 고작 이런 인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썩어서 나는 악취를 어떻게든 숨겨내는 인간이었다.

 

“장세일은 스토커였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아니요. 남자, 친구였어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쉬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증언, 감사합니다.”

 

이번에 내가 쓸 가면은, 내가 받은 롤은 사고로 친구도, 동료도, 애인까지 전부를 잃은 불쌍한 피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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