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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 이후

문제편 이후, 허우석의 이야기

​w.harunic

고민 끝에 건 전화는 통화 수신음이 몇 초 울렸을 뿐인데도 마치 반나절이라도 지난 듯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초조하게 얼마나 기다려보았을까. 슬슬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하겠다고 알리는 소리가 들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연락을 한지 꽤 되었던 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가슴 한쪽에 징 울리는 아픈 것은 조금 덜 했다. 받을 마음이 없는 건가. 우석이 체념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뭐냐. 일 때문에, 바빠서 받는 게 좀 늦었어."

 

"큼, 익선아."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 조금 어색해 메인 목을 짧게 기침하고서 풀어본다. 이미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앞으로 죽 나아가고 있을 익선에게, 사과 한번 한 적 없었던 우석은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 입을 달싹이다 말기를 반복한다.

 

"...천천히 이야기해도 돼. 시간 빼고 왔어."

 

우석이 말을 하지 않자, 익선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다 헤집어 엉망으로 만들던 손을 멈춘다. 잠시간 멍하게 있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을 건넸다. 리더가 뭐라고 나간 놈까지 신경 쓰고 그러는 거냐. 거의 들리지 않게 한 말이었는데 통화음량을 최대로 키워둔 것인지 뭔지 고마우면 얼굴이나 보자고 그런다.

 

할 말을 입 밖으로 내기가 쉽지 않았다. 우석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죽을 것 같이 턱 막혀오는 무언가를 해소해보려 했다. 이미 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나 보지. 그래도 천천히 정리를 해본다.

 

그 녀석이 없는 밴드는 우석이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분위기가 그랬다. 거기에 한도윤이, 그렇게 되어버린 건 우석의 탓도 있었을 거라.

 

왜 그랬느냐고. 너 같은 새끼가 왜 한도윤을 부추겨서. 여론은 물론이고, 멤버들의 눈빛마저 그렇게 읽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리는 멤버들을 뿌리치고 우석은 그대로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밴드도 나오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를 날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뛰쳐나갈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야 연락하느냐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심호흡하는데도 숨이 막혔다. 우스워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오기로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를 냈다. 익선에게 전화를 걸었던 이유를 내뱉기 위해서.

 

"도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

 

"...그래."

 

"그렇게 쉽게 알려줘도 되는 거였나."

 

우석이 허무한 웃음을 흘리자 핸드폰 너머의 익선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핏 들어도 복잡한 심경이 전해져와, 우석은 욕실 벽타일에 머리를 기대고 구역질을 참으며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린다. 익선이 자신을 기다려주었듯이.

 

"도윤이, 뒤끝 없는 건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알지. 한도윤 그 말랑한 순두부 같은 성격."

 

"그래."

 

짧게 답한 익선이 쉬어가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뭘 말하려고 그러길래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이어진 말이 우석의 마음에 덜컥 내려앉았다.

 

"도윤이도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 자식 언제 오나, 하고."

 

"그것참, 무거운…. 말이네."

 

"알면 다행이지."

 

익선이 장난스레 우석의 말을 받아치며 작게 웃었다. 참, 이상한 놈이다. 나도, 저놈도. 생각해보니 조금 짜증이 나려고 했다. 다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친한 척 대해주는 것도 참 볼만 했으니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편협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인심이 후해진다더니. 딱 익선을 보고하는 말이었다. 아니면 우석 자신이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만.

 

"너는 탓 안 하냐?"

 

"뭘."

 

"...아니다. 내가 물어봐서 뭘 하겠냐."

 

모르는 척하는 녀석을 쏘아붙일 기분도 들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직 기억하거든.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서기까지 똑똑히 듣고 보았다. 어디 살인자 새끼가 잘사는지 한번 두고나 보자고 중얼거리던 게,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게 누구였는지.

 

"싱겁기는."

 

통화 너머로 작게 울리는 익선의 웃음소리가 썩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도 비겁하고 구차한 우석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익선도 우석도 이제 와서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는다.

 

*

 

셔츠를 빳빳하게 다려 구김 없이 만들고 까만 재킷의 먼지를 털어 깔끔한 차림으로 버스에 탔다. 택시를 타면, 중간에 내려달라고 할 것 같아서. 차창에 반사된 제법 깔끔한 자신의 모습에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윤이 지나왔을 길을 눈에 담아둔다. 눈을 감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도망치는 걸 그만두기로 했으니.

 

마지막 정류장의 이름이 불리고, 길고 길었던 찌질한 생각도 끝이 난다. 버스의 문이 열린 뒤 한참 후에나 내린 우석이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절이 아니면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장소였으나, 그 시기를 대비하여 주차장이 넓은 탓에 텅 빈 느낌이 강했다. 도윤이 이곳에 왔을 때도 그랬겠지. 배신했으면, 떵떵거리며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가슴 한켠에 무언가 턱 막힌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기를 그만두고 발을 옮겼다.

 

오전의 조용한 납골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 번호까지는 듣지 못해서, 건물 전체를 빙 둘러보다가 마지막 층 싸늘한 모서리 칸에 도달해서야 제가 찾던 세 글자를 발견했다. 뭐가 이리 찾기도 힘든지. 살아있을 때는 매일, 곧 죽어도 눈에 들어와서 짜증 나던 놈이.

 

"야, 한도윤."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전에 불렀던 때에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절어있던 음성이 지치고 힘없는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오는 게 너무 늦었나 보다. 납골당의 맨들한 바닥 위로 자박거리는 자신의 발소리만이 울리고, 도윤의 이름 석 자와 함께 잡동사니가 걸린 자그마한 칸을 눈앞에 두었다.

 

밴드 시절에는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어서 이해는 하겠다만, 무슨 교복을 입은 채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사진을 걸어놓는 건 누구 취향인지.

 

"누군지는 몰라도 참…."

 

교복을 입은 도윤의 주위로 익숙한 얼굴이 주르륵 붙어있다. 익선, 태희, 주용. 같은 학교를 나왔다더니, 그들 중 하나가 졸업사진을 가져다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묘한 표정을 지은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고 느끼는 건 이미 떠나간 자에 대한 미화이겠지.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없는 놈에게 뭘 바라냐.

 

바지 주머니를 뒤져 금속재질의 피어싱을 꺼냈다. 낮은 기온에 차갑게 식을 만도 한데, 주머니 속에서 데워졌는지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손안에서 데굴 굴러다닌다. 도윤이 우석의 집에 두고 간 물건 중 하나였다. 뭘 자꾸 흘리고 다니는지, 도윤이 배신한 뒤에야 발견하고 버릴까 하다가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던 물건이 이제서야 제 주인을 찾아간다.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다가 피어싱을 사진 한쪽 귀퉁이에 끼워두었다. 피어싱이 사진 속 익선의 다리를 꿰뚫은 건 뭐, 자그마한 복수였다.

 

"허우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였는지 잊을 수 없을, 지긋지긋한 목소리. 이름이 불리고, 고개를 돌린다. 뭔지 모를 꽃 한 송이를 든 주용이 성큼 다가와 눈빛으로 뭘 하러 왔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오면 안 되나."

 

"이름만 불렀어."

 

"뭐. 어쩌라고."

 

주용이 한숨을 쉬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도윤의 이름이 적힌 팻말 근처에 꽂아 장식한다. 우석이 힐끔 바라보다가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건 주용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참 끝까지 사이좋은 친구로 남는다 싶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이가 없어서. 납골당 입구에 적혀있던 안내문에는 생화를 들여오지 말라고 되어있더니만 그걸 기어코 어기는 놈이 여기에 있었다.

 

"저거 저 사진도 네가?"

 

"아니. 태희가."

 

대답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태희의 취향은 시간이 흘렀다 해도 별 바뀐 게 없는 것 같아 웃기다. 그놈은 자기 센스가 구린 것도 모르고 있을 거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주용이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주용도 마찬가지로, 그대로였다. 대화의 시작이 많이 뜬금없어서 알아듣기 힘든 거나, 사람 하나 말려 죽일 것 같은 저 눈이나.

 

“언제쯤 돌아올 거야? 혼자 있는 건 이제 끝내는 게 낫지 않아? 너 찾아주는 데도 없는 것 같던데?”

 

“갑자기 뭘 말하는가 했더니. 아니. 안 가.”

 

갈 일 없을 거다, 라고 말하려던 때에 눈이 마주쳤다. 귀찮게. 사람이 구해지지 않으니 대체재가 필요하다, 이거였다.

 

“눈깔 치워라, 김주용. 어차피 밴드는 끝났잖아. 황익선 취업한 거 못 봤냐? 너도 취업이나 해라.”

 

그래도 취업 이야기는 싫었던지 슬금슬금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 발자국 멀어졌다. 이대로 더 멀어져서 말도 안 걸면 좋을 텐데. 완전히 남남으로 돌아서서, 전처럼 아는 척하지 않는 사이로. 저기 와 놓고도, 인사 한번 하지 않는 유태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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