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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의 원칙

​문제편 이후, 하수창의 이야기

​w. 해무

* 검은방 시리즈의 하무열이 등장하나,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똑똑.
"수연아."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선 수창이 문을 두드린다. 수연아. 재차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려 보지만, 고요한 침묵만이 되돌아온다. 후우우. 낮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 수창이 다시 조곤조곤 방문 너머에 있을 수연을 향해 말을 건넨다.
"식탁에 오늘치 약이랑, 돈 올려놨어. 아직 팔이랑 다리 조심해야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밥 꼭 사 먹어. 약도 까먹지 말고. 식후 30분이니까 먹고 좀 불편하더라도 바로 눕지 말고─"
이래저래 걱정을 늘어놓던 수창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개미만큼 목소리가 작아졌는데, 방문 너머에서는 이불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창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노크하기 위해 손을 말아쥐었다가,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결국 속절없이 내리고 만다. 말을 마치고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던 수창은 뒤늦게 몸을 돌린다. 사박, 사박. 걸을 때마다 정장 바짓단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그 사이사이로 면양말이 장판에서 미끄러지는 소리, 낮게 내뱉는 숨까지.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들인데, 왜 지금은 귀에 닿는 모든 소리가 거슬리는지.
"……후우."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던 수창이 다시 발을 내디딘다. 평소보다 더 공허하고 넓게 느껴지는 거실을 지나, 냉기가 도는 현관 앞에 멈춰선 수창이 신발장을 올려다본다. 달칵. 동생의 방문처럼 꼭 닫힌 신발장은 손잡이를 잡아당기기가 무섭게 쉽게도 열린다. 아까전 동생의 방문도 이렇게 문고리를 당겼더라면 열렸으려나, 와 같은 생각을 하며 제일 위 칸에서 검은색 구두를 꺼낸다. 적당히 광택이 도는 앞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창은 이내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한쪽씩 발을 끼워 넣으니 뻑뻑한 뒤축이 뒤꿈치를 압박한다. 후으, 앓는 소리와 함께 양발에 구두를 안착한 수창은 굽혔던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선다. 그리곤 현관 앞 바닥 타일에 탁탁, 구두 뒷굽을 부딪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측면에 걸린 거울에 시선을 둔다.
잘 다려진 흰 셔츠의 목깃을 동여맨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양복 재킷, 그리고 세트로 입은 양복바지.
일주일째, 수창은 검은 양복을 입고 출근길에 오르는 중이다. 그리고. 수창이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동시에 찬바람이 바깥서부터 불어와 피부 위로 아리게 스며든다. 후우우. 한숨과 함께 퍼지는 입김을 보며 수창이 현관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오늘로써 일주일.
붕괴된 공연장에서 살아나온 동생이 문을 걸어 잠근 지, 일주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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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규혁 군은 정말 안타까워요. 재능이 빛나던 친구였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창이 운전석에 등을 기댄다. 사차선 도로는 어찌나 신호가 긴지, 노래 한 곡이 끝나고도 모자라, 오프닝 멘트를 비롯한 본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까지도 바뀌지 않는다. 이렇듯 무료한 출근길, 졸음을 쫓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날'의 일을 늘어놓기 바쁘다.
10월 4일. 모두를 숨죽이게 했던 어느 새벽 이후. 공중파 방송, 라디오, 인터넷을 비롯한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그날'의 일을 화두에 올렸다. 거진 한날한시에 일찍이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고, 그들의 죽음과 함께 묻힌 재능을 아까워했다. 수창을 연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방송을 보며 의문이 들었더란다. 죽은 이들에게 애도를 표현하는 일에, 재능을 아까워하다니. 떠나간 이들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기에도 모자랄 시간이 아니던가. 왜 죽어서도 한 사람의 삶을 기리는 일보다, 생전 가지고 있던 재능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인지. 누군가 들었더라면 참 꼬인 심사라고 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수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는 정말 솔직한 제 마음이었기 때문에.
[생존자는 오인하 양 뿐이였죠?]
[네. 구조대가 발견한 생존자는 오인하 양뿐이었어요. 당시 굉장히 공포에 질려있었다고 해요.]
[저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故  이규혁 군과 故 한도윤 군은…….]
[네……. 둘은 참, 안 됐어요.]
수창의 얼굴에 균열이 인다. 이마 위로 힘줄이 도드라진다. DJ의 말처럼 공연장이 무너졌던 날, 일곱 중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구조대가 전한 죽음들은 처참했다. 맨 처음 공연장이 붕괴됐을 당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괄 PD, 무너진 잔해 속에서 발견된 FD와 출연자, 그 뒤로 추가 붕괴가 진행되었고……. 구조 직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규혁. 그리고.
그 곁에서 목숨을 끊은, 한도윤.
다만 그는 간발의 차였다고. 구조대가 그를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목을 맨 지 채 일 분이 지나지 않은 터라 희망적이었단다. 아직 체온도 따뜻했으며, 혈색도 사라지기 전이었다면서. 추가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구조대가 서넛이 달라붙어 한도윤을 살리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그는 마지막 사망자가 되었다. 그렇게 일곱 중 여섯이 죽고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은 날에, 그 이전에, 자신은.
「문자 하나 보내는 게 뭐 어렵다고 그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금 네가 저 사람들 신경 쓸 때야? 네 몸부터 챙겨. 그리고 구조대가 갔다잖아. 저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오빠. 난 괜찮아. 그러니까─」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어.」
애원하는 동생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수창에게는 생면부지의 남보다 제 동생이 먼저였으니까. 공연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속에 제 동생이 있었고. 그것도 아직 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몇 번이고 튀어 나가려는 것을 말려대는 구조대가 아니었다면, 진작 무너진 공연장 안으로 뛰어들었을 테다. 그런데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고 버텨서 마주한 동생이 제게 한 말이, 수창은 너무도 기가 막혔다. 바깥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심장이 몇 번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남을 도와달라고. 얼굴이며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데다가, 팔다리에 금이 간 주제에 지금, 뭘 해달라고.
「오빠─」
「하수연!」
수창은 이제껏 동생에게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웬만한 일은 동생에게 다 맞춰주었다.
「도대체 왜 그래! 너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동생이다. 하나뿐인 제 동생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제 가족이다. 늘 좋은 것만, 예쁜 것들만 쥐여주고 싶었다.
「저기서 나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너 기다리면서 나는 미칠 것 같았는데, 차라리 너 대신 저 안에 내가 있게 해달라고 수없이 빌었는데, 고작 하는 말이 뭐? 생판 남한테 문자 좀 보내줘라, 말 상대 좀 해주면 안 되겠냐─ 미쳤어?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눈이 있으면 거울을 봐! 네가 지금 남 걱정하게 생겼냐고!」
하지만 수창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한숨을 쉬어가며, 생전 동생의 앞에서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모든 행동을, 그날 단 하루 만에, 단 십 분 만에 저질러버렸다. 수연은 적잖게, 아니 꽤 충격받은 듯했다.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하며 저를 바라보다 기어코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았다. 그 뒤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수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수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이다.
약을 먹고도 새벽 내 앓던 수연은 겨우 잠이 들었으나, 아픈 동생을 눈앞에 둔 수창이 쉽사리 잠에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땀 흘리는 이마를 닦아주고, 뒤척거리느라 이불이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다시 끌어올려 주는 내내─ 수창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동생에게 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행동들까지 했다. 이럴 거면 다짐은 왜 했으며 약속은 왜 했던가. 더욱이 잠에 들지 못했던 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방송도 한몫했다. 그나마 지상파 방송은 자정이 넘어가니 조용해졌는데, 케이블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골 아프게 울려대는 목소리가 거슬렸으나, 부러 끄지는 않았음이다.
새벽 네 시가 지났을 무렵.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다, 잠깐 동생의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해가 아파트 산 너머로 걸려있었다. 반사적으로 침대 위를 두드리며 잠에서 깬 수창은, 언제 벗어놨는지 모를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거실로 나섰다. 그리고 동생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왜 일어났느냐며, 그 다리로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냐고 묻기도 전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총 여섯 명으로─」
동생의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신승연. 서혜성. 장세일. 민주영. 이규혁. 쿵, 쿵. 쿵. 호명되는 이름 사이로 섞여드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벼락처럼 떨어졌다. 이름이 열거되는 동안 수창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한 손으로 누르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을 떼면 심장이, 그대로 위액과 함께 올라올 것만 같아서.
쿵.
「마지막으로─」
쿵, 쿵.
「한도윤 군입니다.」
곧바로 수창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입밖으로 멀건 위액을 쏟아내는 동안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삐이이─ 삐이이이─ 이명이 머릿속까지 휘젓는 내내 조금 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한도윤 군입니다. 한도윤, 한도윤─
「우우욱, 웨엑─」
달칵.
그러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는 변기 물에 잠겨 죽을 것만 같았는데, 갑작스레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변기에 얼굴을 처박은 채 구역질을 하던 수창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두 눈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분간되질 않았다. 속은 여전히 메슥거렸으며, 어지러웠다. 다 죽을 꼴로 세면대 앞에선 수창은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틀어 엉망이 된 얼굴을 씻었다. 그렇게 번잡스러운 마음을 물에 씻어 내리고 나왔을 때는, 이미 거실은 텅 비어있었고.
「수연아…….」
방문은 굳게 닫힌 뒤였다. 그 후 일주일이 넘도록 수창은 수연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섯이 죽고 하나가 살았다던 그 어느 새벽에, 모든 게 망가졌다. 아니, 망가져 버린 기분이다.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에 수창의 눈가가 잘게 떨린다. 
삐이이이─
귀에서 다시 이명이 들린다. 귓속을 파고드는 이명에 뇌가 절여지는 것만 같다. 삐이이이─ 수창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대체, 대체 내가…….
삐이이─ 삐이이이─
"내가 어떻게……."
어떻게, 했어야, 해.
삐이이이이─ 삐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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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 시. 하루의 반이 지났다. 그사이 수창은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으나, 결국 전송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밥 먹고 있을 시간이다, 지금은 약을 먹었을 테니 졸릴 것이 분명하고, 또……. 거진 핑계에 가까운 이유를 들어가며 이리저리 미루다 보니 벌써 세시가 된 것이다. 그런 수창이 답답했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직원이 대신 전송 버튼을 눌러줄 테니 내놓으라며─동료 직원은 저와 동생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휴대전화를 뺏으려고 드는 통에 꽤 애를 먹었다. 사실 수창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보다도 동생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약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건지. 뭐가 됐든 건강이 우선인데, 후우. 한숨을 폭, 쉬며 수창은 책 하나를 집어 책장에 끼워 넣는다. 이대로 퇴근할 때까지 시간 때워야지. 누가 들었더라면 퍽 월급 도둑이다 싶은 이야기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동생 걱정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지이잉─
상자 위로 손을 뻗던 수창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이잉. 연거푸 울리는 진동음에 수창은 허둥지둥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는, 누군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냅다 귓가에 갖다 붙인다.
"여보세─"
[도서관에서 전화 받아도 되냐?]
똑똑.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수창의 고개가 돌아간다. 창문 너머에는 개구진 웃음을 지은 무열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다. 이제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수창이 어버버─ 하며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그사이 무열은 휴대전화를 톡톡 두드려 끄고는, 수창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다. 잠……! 막 소리치려던 수창은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입을 꼭 다문다. 도서관에서는,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반쯤 경보하다시피 열람실을 빠져나온 수창이 복도를 가로질러 걷는다. 연락도 없이 오실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혹시, 수연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결국 뛰다시피 정문으로 달려 나온 수창이 밭은 숨을 몰아쉰다. 정문 앞에는 입구 기둥에 기대어 선 무열이 담배를 입에 문 채 '왔냐?' 하는 것이다.
"후우─ 삼촌, 연락도 없이─ 일단 담배, 부터 끄세요."
"너 고작 거기서 여기까지 뛰어오는데 숨차냐?"
"삼촌. 담, 배. 담배부터 꺼요."
"아이고, 이 범생아.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랬잖냐."
"담배! 삼촌, 담배! 도서관은 금연이라고요! 신고당하고 싶으세요?"
짜증스럽게 답하는 수창을 향해 무열이 끅끅거리며 웃는다. 무열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에 쥐고 탁탁 털며 말을 잇는다.
"정확히는 바깥이니까 문제없지 않나?"
"위치상 아이들이 많이 오가는 데다가, 나이 드신 분들도 계시고요. 경찰서랑 다르다고요."
"음? 경찰서도 원래는 금연이야."
한마디도 밀리지 않는 제 삼촌을 보며 수창이 머리를 움켜쥔다. 아이고, 두야.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인상을 쓰는 수창을 보며 무열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린다.
"이번에는 두통이냐? 이야, 이 새끼 이거 멀쩡한 구석이 없네."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게 지금 누구 때문인데─"
씩씩거린 수창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 아직 채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무열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터진다. 후우. 한숨을 쉰 수창이 묻는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기별도 없이."
"했잖아. 연락."
"……일단 들이닥치고 전화 한 것도 연락으로 쳐요?"
"그 정도면 됐지, 뭘."
무열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톡, 바닥으로 떨군다. 떨어지는 담배를 따라 시선을 옮긴 수창이 왈칵 인상을 찌푸린다.
"담배 아무 데나 버리지─"
"수창아."
아직 불씨가 남은 담배꽁초를 무열이 구둣발로 지져 끈다. 수창은 이제 꽁한 표정으로─제 말은 하나도 안 듣는 삼촌에게 불만도 있거니와─ 무열을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눈썹을 휙 끌어올린 무열이 말을 잇는다.
"너, 얼굴이 왜 죽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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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도서관 담벼락에 기댄 무열과 수창이 나란히 앞을 보고 서 있다. 티 없이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무열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다.
"공연장이 무너져서, 금쪽같은 내 조카가 다쳤고."
잇새로 씹는 담배 필터의 맛이 밋밋하다. 그런데 무열은 세상 쓴 것을 삼킨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수연이가 문자 하나만 보내 달라, 했는데 너는 안 해줬으며."
무열의 말이 이어질수록 수창의 고개가 땅으로 향한다.
"나중 보니 걔는 죽었다, 이 말이지."
그래서 둘이 냉전 중이고. 대답은 고사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 수창이 애꿎은 손바닥에 손톱만 꾹꾹 박아넣는다. 기별도 없이 얼굴부터 들이민 무열에게 왁왁거리며 얼굴을 붉힌 것도 잠시, 수창은 무열이 묻는 말에 일련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수연이 누굴 좋아하는지─이건 무열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터, 그 공연장에 왜 가게 되었고, 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등등……. 무열은 참을성 좋게 담배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윽고 수창이 말을 마치고 난 뒤에는 꼬박 십 분이 지난 뒤였고, 무열은 그사이에 축축해진 담배 하나를 버리고 새것을 입에 물었다.
"수창아."
십 분 남짓 들은 이야기는 제법 명료했다. 인과 관계가 확실했다. 다만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가 와서 듣더라도.
"네 잘못이라는 말을 들으면, 좀 편할 것 같냐? 너."
모두 수창의 잘못처럼 들린다. 점점 더 수그러지는 고개를 보며 무열은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이야기 속에 수창은 없었다. 그날 일어난 일들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으며, 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 그런 것들이 모두 빠져있었다. 달칵, 달칵. 지포 라이터를 한 손으로 매만질 때마다 불꽃이 터지고 기름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안 편하지. 그럴 리가 없지. 이게 어디 편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치? 근데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서 그런 거잖아. 다 내 탓이다, 이렇게. 내 말이 틀렸냐?"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 마라. 눈에 다 보인다."
수창을 입술 끝을 말아 문 채 한숨을 폭, 내쉰다. 그리곤 구두코로 땅바닥을 톡톡, 걷어찬다. 저거 저, 구두 다 상하게. 쯧. 무열은 혀끝을 차며 고개를 돌린다. 곧지나 수창의 입이 열린다.
"……사실, 문자를 보낼 걸 그랬나 싶기도 해요."
"네가 뭘 할 수 있어서?"
날카롭게 되돌아오는 질문에 수창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진다. 입을 열면 목 끝을 비집고 절망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수창은 입을 꼭 다물었다. 무열은 느물느물해진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새것을 꺼내 입에 문다.
"그래, 뭐 수연이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거 보고 왔을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무시하겠어. 수연이는 정의로운 애잖냐."
달칵, 달칵.
"그런데 수창아, 그게 네가 나설 이유가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라면 안 해. 수연이가 부탁한 일이고, 이런 거 다 떠나서. 불확실하잖아. 네가 나서서, 뭐가 달라질 수 있는데?"
수창은 말없이 구두 굽을 벽에 딱딱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작게 이는 파동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본체만체하며 수창이 말한다.
"적어도 지금과는 달랐겠죠. 근데─"
"근데?"
"그게 되레 어쭙잖은 희망을 심어주는 걸까 싶어서, 그래서 안 보냈던 거예요."
"그래. 그게 맞잖아. 그럼 뭐가 문제야?"
수창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무열을 마주한다.
"그래도, 혹시나……, 아주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머릿속에서……, 안 지워져요."
기어코 목소리에 떨림이 이고, 말을 마친 수창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린다. 무열의 시선이 수창의 고개보다 조금 더 아래 땅바닥에 머무른다. 방울져 똑똑 떨어진 물방울이 수창의 발치 주변을 짙게 물들인다. 작게 한숨 쉰 무열이 답한다.
"그런다고 한도윤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살아 돌아오냐?"
쿵.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다. 묻는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창아. 다 지난 일이다. 네가 골백번 고민하고 이래저래 가설을 세워도─"
달칵. 무열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번에는 금연이다 뭐다 구박하는 소리 없이 잠잠하다. 후우우. 무열은 고개를 치켜들고 긴 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구름이 유영하는 하늘 위로 번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는 무열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 지났어. 놓친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무열은 지금도 수창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다. 생판 남이고, 이미 지난 일인데. 오히려 자신은 그 녀석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은 수창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결과가 어찌 되었든 합리적이었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수창아."
다만 무열은 모르지 않았다. 큰 녀석이나 작은 녀석이나, 무열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디선한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니 제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도 온 마음 쓸 수 있는 것이겠다.
"하수창."
"……저, 귀 안 먹었어요."
고개를 돌린 무열이 수창을 바라본다. 한껏 등을 구부린 채 어깨를 떠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애 꼴이다. 이런 무열의 생각을 수창이 알았더라면, 제법 억울해할 일이었으나. 어쩌겠는가. 키가 이만큼이나 컸어도 여전히 애인 것을. 그러니 이제 어른의 역할이 필요할 때다.
"수창아. 나라면 말이다."
담벼락에 담배를 비벼 끈 무열이 낮게 읊조린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괴로워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결과야 어찌 됐든, 이미 끝이 났는데, 그럼 이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이렇게 울고 있을 게 아니라."
그러니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무열은 손을 뻗어 수창의 어깨를 두드린다. 작게 이는 떨림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안, 울어요."
작게 헐떡이며 수창이 고집스레 말한다. 조금 웃음이 터질뻔했으나, 지금 웃었다가는 두고두고 앙갚음을 당할 것이 뻔해 관두었다. 무열은 고개가 꺾어져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파란 하늘 위로 구름이 느리게 유영한다. 아, 날이 지나치게 맑은 것을 보아하니, 오늘은 비가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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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내 비치된 직원 데스크에 앉은 수창이 창밖을 바라본다. 흰 줄로 나뉜 사각 프레임 속 하늘이 어느새 희뿌옇게 물들었다. 맑았던 것이 마치 오래전인 것처럼 희끄무레해진 하늘을 보는 수창의 눈이 고저 없이 잔잔하다.
「이미 지난 일이고, 더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수창도 알고 있었다. 다만 후회는 됐다. 비집고 나오는 슬픔과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이라는 가정에 몸부림쳤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도 아니면 떠나는 길에 홀로 외롭지 않게, 곁을 지킬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아. 수창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진다.
그날 이후부터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도윤이 제 꿈에 나와 말갛게 웃기도 하고, 저를 원망하며 울기도 하고, 제법 잔인하게도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수창은 별수 없이 자신을 원망했다. 할 수 있는 게 그때는 그것뿐이었으니까. 사실은 부정해왔는지도 모른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내가 죽인 거라고. 내가 외면했다고. 명백하게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이 죄책감에서 수창은 울고, 울고, 또, 울고……. 그렇지만 이제는.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할 수 있는 걸 하자. 무의미하게 울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도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로 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지나간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값은 이미 톡톡히 치르지 않았던가.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선 수창이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양복 재킷을 옆구리에 낀다. 그리고는 빙─ 돌아서 데스크를 벗어난다. 뚜벅, 뚜벅. 올곧은 걸음 소리가 도서관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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