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의 질량
트루엔딩 이후, 허우석과 한도윤의 이야기
w.선장
* 우석도윤 cp 요소가 있습니다.
한도윤은 호모였다.
밴드 내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허우석 자신 뿐이다. 한도윤이 주변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타입도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다른 멤버들은 눈치를 자취방 근처 고양이들한테 치킨 목을 던져 줄 때 같이 줘 버렸는지 섬세함과는 담을 쌓은 수준이라 자기 친구가 그쪽이라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기색이었으니 아마 이 세상에서 한도윤이 호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도윤과 키스를 했던 자신 뿐이리라.
남들이 들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이야기다. 하지만 허우석은 한도윤과 무슨 사이도 아니었다.
무슨 사이. ‘ㅇ’ 이나 ‘ㄴ’으로 시작하는 어떤 사이. 둘은 함께 잤지만, 연인이 아니었다. 서로의 남자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허우석 자신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한도윤도 마찬가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겁이 나서 그랬던 건지, 지금에 와서는 모를 일이다. 평생 모를 것이다.
한도윤은 꼴에 음악을 한답시고 밤중에 나와서 간혹 밤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염색 한 번 하지 않은 머리카락은 아주 검어서 밤중에 시커먼 추리닝 입고 나와 서 있으면 그림자와 구별이 안 되고는 했다.
드물게 선선한 여름밤이었다. 한도윤은 담장 뒤에 쪼그리고 앉아 청승맞게 고개를 처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긴 머리가 멋대로 나부꼈다. 막 샤워를 한 참인지 샴푸 냄새가 났다. 남자한테서 샴푸 냄새가 풍기면 징그러울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다.
“왜. 아주 센치해?”
“…”
뭔가 영감을 받았을 때 한도윤은 꼭 다른 사람같이 보였다. 눈빛은 먼 곳을 응시하며, 미동도 않고 한참을 같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마치 육체만 이쪽에 두고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가 있는 것처럼. 한도윤이 그렇게 해서 떠올린 멜로디들은 피자 기름 때문에 얼룩진 종이에 적히는 신세가 되지만, 어찌 됐든 그것들은 늘 번듯한 곡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어쩌다 작업을 한다고 각 잡고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날엔 멤버를 불러 의견을 묻기도 했다. 모두 다 있는 경우라면 리더인 황익선을 불렀는데, 근처에 허우석밖에 없으면 허우석에게 물어보는 식이었다. 그건 곧 누구든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번은 좀 진지하게 피드백 받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한도윤은 모든 의견이 전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허우석은 한도윤의 발언으로 대변되는 이 밴드의 전반적으로 설렁설렁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점은 바라지도 않는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으로 먹고살려고 나온 놈들 아닌가. 그렇다면 아주 최소한의 유명세와, 팬과, 스폰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지금 같은 태도로는 그 최소한은 어림도 없다.
그럼에도 허우석은 한도윤의 얼굴을 마주 보면 대놓고 모진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한도윤의 태도가 자신을 유혹했다. 아주 먼 곳을 응시하던 눈빛이 제 목소리 한두 마디에 현실로 돌아와 왜, 우석아. 하고 나지막이 답하는 모습은 너무도 달착지근했다. 수마(睡魔)에 못 이겨 힘겹게 끔뻑이던 묵직한 눈꺼풀을 끝내 닫아 버릴 때의 달콤함과도 같았다.
보라, 이번에도. 한도윤은 적막 끝에 운을 뗀다.
3,
2,
1
왜, 우석아.
“넌 나 왜 뽑았냐?”
“내가 뽑았냐. 애들이 뽑았지.”
“너도 의견 보탰을 거 아냐.”
“목소리가 좋잖아.”
허우석은 충동적으로 한도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랑 해 본 적 있냐?”
허우석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아니.”
한도윤이 답했다.
아무튼간에 허우석은 한도윤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
공연장 붕괴 사태가 일어나고서 몇 주가 지난 뒤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냉장고를 뒤지고 있던 참에 진동 소리와 함께 화면에 뜨는 김주용이라는 이름 석 자는 허우석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마스커레이드가 사실상 붕괴한 이후 자신이 내치려고 했던 멤버는 물론 자신에게 동조했던 멤버들 모두와는 한 번도 연락다운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이 와중에 내심 한도윤일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져서 허우석은 괜스레 미간을 팍 찌푸렸다. 거기다 이 드럼이란 놈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우석이 너는 안 가봐도 되냐?]
“엉? 뭔 소리야?”
[도윤이 병원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저번부터 쭉 페이터에서 보이던데. 걱정하는거 아냐.]
“야-. 그런거 아니거든.”
[…암튼. 후회하지 말고.]
허우석이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씨발.. 뭔 지 할 말만 하고…”
김주용이 그러지 않아도 언젠간 가 보려고 했었다. 감정은 감정이고, 사람이 다친 건 다친 거다. 암만 안 좋게 헤어졌다 해도 예전에 부대끼던 사이였으니 멀쩡히 살아 있는지 얼굴은 확인해 봐야겠지. 그런데 전화까지 했으면, 장소정돈 알려 줄 것이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건 어느 동네 예의인가. 이러면 한도윤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치 한도윤과의 연락을 유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더러워졌다. 김주용이 그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다, 연락은 딱 한 번만.
한도윤이 순순히 알려주면 문안을 가고, 아니면 깔끔히 포기하자. 그렇게 허우석은 주소록을 내릴 대로 내려 찾은 한도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너덧 번의 발신음이 울리고 나서, 한도윤은 전화를 받았다. 저편은 아무 말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허우석은 허공에다 말을 거는 기분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병원 어디냐.”
**
한도윤이 읊어 준 주소는 서울 복판의 한 대학병원 별관을 가리키고 있었다. 붕괴 사태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죄다들 진즉 퇴원했다는 모양이다. 엄살이나 부리고 있는 건 아닐 것이고, 얼마나 다친 거지? 손은 괜찮으려나.
…왜 이딴 생각이나 들고 지랄인지. 허우석은 걷다 말고 가로수에 발길질을 했다.
병실은 40X호에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숨을 죽이고 미닫이문을 한도윤은 걱정이 무색하게 멀건 얼굴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순간 들었던 안도감은 남몰래 느끼기로 하고, 허우석은 사 들고 온 사과를 들어 보이며 거들먹대는 태도로 물었다.
“과일은 먹을 수 있냐?”
“어.”
전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 병실에서 이쁘게 사과나 깎아주는 꼴이란. 허우석은 완벽한 솜씨로 깎인 흰색의 사과 조각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비웃었다. 한도윤은 사과를 집어 들고 와작와작 잘도 먹었다. 눈빛이나, 체구, 태도 같은 것들, 음식을 씹을 때 입을 꾹 다물고 볼만 우물대는 것, 전부 예전과 똑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병상 위에서 허우석은 익숙함을 느꼈다.
“김주용 안 왔었어?”
“…안 왔는데? 밴드 애들은 니가 처음이야.”
“그놈이 진짜…”
“조만간 만나자고는 했어. 진짜 올진 모르겠지만.”
한도윤이 덧붙였다. 꼴에 연락을 하긴 한 모양이구만. 김주용은 병원이 어딘지 안 알려준 게 아니라 못 알려줬던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데 남에게 알려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제꺽 안 뒤졌냐고 안 물어봐?”
허우석이 핸드폰을 한참 노려보며 인상을 쓰는 꼴을 지켜보던 한도윤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페이터 멘션 날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은근 말은 잘한다. 허우석은 치미는 욕지기를 씹어 삼켰다.
“씨.. 그래. 안 뒤져서 아쉬워 죽겠다.”
“살아남아서 안타깝게 됐네. 곧 퇴원해.”
한도윤은 두 눈을 끔뻑이며 허우석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익숙한 달콤함이 허우석의 입안을 감싸고 돌았다. 하지만, 이제서 거기 넘어갈 수는 없었다. 타임 오버다. 허우석은 못을 박기로 했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
“너나 내 페이터 계정 염탐하지 마”
허우석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