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밤 이야기
트루엔딩 후 수 년 뒤, 오인하와 한도윤의 이야기
w. 강종
겨울이 완연한 시내의 밤은 연말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목을 기대하는 가게와 조경 투자에 게을리하지 않는 시 기관의 합작으로 반짝거리는 색색의 조명은 낮보다 화려한 밤의 인공미를 빛의 형태로 발산하고 있었다. 키 작은 회양목 위로 늘어진 전선은 가지 사이사이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둠에 자신을 숨겼다. 검은 줄기에 알알이 여문 꼬마전구들은 저희로 사람들을 홀려 빨간색으로, 흰색으로, 노란색으로, 시야 한켠에 걸려 깜박거린다. 간판을 두른 전선들도 마찬가지다. 상호를 가리지 않게 옆으로 잘 늘어뜨린 전선 끄트머리엔 ‘감전 주의. 만지지 마세요.’라고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가 매달려 있다. 온 사방이 번쩍거리는 빛으로 눈이 부시고, 온 거리가 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람들로 득시글하다. 흔한 연말의 풍경이었다. 이곳 어딘가 생업에 종사하는 누군가는 매년 진절머리를 내며 이 길을 가로지를 것이고, 그러다 연말에만 잠깐 이러고 만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함을 느낄 것이며, 공교롭게도 종교인이라 그것을 올해의 감사 기도 목록에 채워 넣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조명의 수만큼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이곳에 있었다. 하늘의 별을 지워버린 대신 인간이 수놓은 별들로 가득한 땅을 무수한 사람이 살아 거닐고 있었다.
그곳에서 몇 개의 신호등이 한도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발아래 횡단보도가 놓이기 전에도 그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고 아는 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에서 몇 달이 지나자 한도윤은 화제의 중심에서 무관심한 저변으로 내려왔다. 이제 와 야상 점퍼의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쓴 까닭도 타인과는 관련 없었다. 한낮에만 잠깐 영상으로 오르고 대체로 영하에 머무는 기온이 아직 한파라 이를 정도는 아니나, 맨손을 언 손으로 만들기엔 충분히 낮기 때문이었다. 장갑 낀 손으론 휴대전화를 조작하기 어려워 꼼지락댄 손이 추위에 금세 얼어 곱아들었다. 해가 진 지 오래라 어둑한 사위로 액정의 불빛이 얼굴을 희게 비췄다. ‘곧 도착’ 메시지를 보내자 답장은 바로 왔다. ‘ㅇ’
화제의 메인 소식 코너에서 변두리, 자투리로 밀려간 한도윤의 이름 석 자 위로 먼지가 쌓이고 아래로는 모였던 관심이 흩어지는 동안 그를 파묻은 자리에는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눈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정녕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편은 아니나,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 다시 세워지기까지 걸린 시간의 합은 연 단위의 계산을 요구했으므로 적잖은 시간이 지났다고 볼 수 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악몽에서도 폐허에 홀로 웅크려 있지 않았다. 매몰된 그날의 기억은 더는 그의 내면을 붙잡고 있지 않았고, 한도윤은 제법 덤덤한 기분으로 한때 제가 매장되었던 구덩이를 바라볼 만큼 여유로워졌다. 모두가 빠져나오진 못했기에 구멍이 완벽하게 메워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한도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필요함을 경험으로 배웠다. 앎에 변화가 즉각 뒤따르지 않아도 조급하게 굴지 않는 모습은 누가 보고 성인군자라도 되는 양 굴고 있다고 비아냥거려도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이따금 보이는 미소가 상대나 자신을 향한 조소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에게도 만약 자신에게 총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자기 머리를 날렸을 것이라고 뇌까린 날이 있었다.
오래 걷지 않았음에도 숨이 차는 걸 깨달은 날도.
강박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들었던 나날을 돌아보면서 느낀 건, 이제야 겨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느끼는 자신이었다. 새삼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먼 길 돌아 다시 온 이곳이 처음 발을 디뎠던 곳과 같지 않아도 괜찮은 것을 지금은 알지만, 돌아가야 한다고 되뇌기만 할 뿐 쉬이 그러지 못했던 까닭에 저의 게으름만이 있진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도. 가야 할 길 아스라하고 지나온 길 까마득한 도중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이제 가서 언제 오느냐는 곡소리가 귀에 사무치게 박히던 때가 있었다. 영정을 보면 노래가 들리고 유작을 들으면 입매가 보였다. 눈과 귀가 어인 곡절로 서로를 한 마디씩 나눠 가졌는지 모를 일이나, 안개에 잠겨 출렁이는 소리는 빽빽한 매질을 타고 사방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물수제비 던진 것처럼 퉁 탕탕 팡. 마지막으로 부딪힌 수면 아래로 꼬르륵 가라앉은 수면이 익사하면 그를 대신하여 침대엔 불면이 똬리를 튼다. 죽은 잠은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부유하는 먼지마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 밤.
약국에서 산 수면유도제를 삼켜도 드라마틱하게 잠이 오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새벽이 그에게도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과 밤 못 이루는 생을 넘지 못할 것 같았던 나날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너머에 있었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 가게마다 트는 캐럴이 메들리로 이어지는 밤, 박자에 맞춰 흔드는 핸드벨이 경쾌하게 울리는 거리에 그가 있었고, 여기서 그는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한도윤의 눈이 목적한 건물을 찾아냈다. 발이 그곳으로 움직인다.
문을 열자 문 바깥쪽에 고정된 도어벨이 딸랑딸랑 울리며 방문자를 알렸다. 외풍으로 인해 문간과 창가 쪽 테이블은 비어 있지만 안쪽엔 제법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서로 의도적으로 관심을 거두는 손님 간 예절을 십분 발휘하여 한도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함치는 이는 없으나 부러 줄이지도 않는 크기의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가 오가는 카페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던 한도윤은 이윽고 붙박이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한도윤이 바짝 곁에 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타인을 무시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엄지만 휙, 휙, 아래위로 움직이는 데 열중하고 있었지만,
“오인하.”
아, 짧은소리를 낸 그의 눈이 한도윤을 향했다. 두 눈엔 금세 반가움이 가득 담기고 손은 서둘러 반대편 의자에 올려 뒀던 가방을 치웠다.
“왔냐? 한도윤.”
“그래. 왔다.”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만날 수 있는 친구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더 소중하다. 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근처 카페에 신메뉴가 들어왔는데, 간만에 서점 좀 구경 가려고 하는데. 거창하지 않은 사소한 목적으로도 기껍게 불러내고 불리는 친구는 소중하기 그지없다. 사고 이후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 중 가장 자주, 가깝게 만나는 사람은 단연 그였다. 한도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얼굴 좋아 보인다? 저번에 봤을 땐 죽을상이더니.”
“사돈 남 말 하시네. 그러는 너도 울상이었잖아? 과제 때문에.”
“야, 울상이랑 죽상이랑 같냐?”
같진 않겠지만 한 얼굴에 동시에 자리할 순 있었다. 한도윤이 음료를 주문하고 30분 후. 호기롭게 손가락을 척 치켜들어 한도윤을 가리키던 오인하는 테이블 위로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박았다. 울상과 죽상 사이를 오가던 얼굴이 감춰졌다.
“죽어도 좋아…….”
한도윤은 머그잔 안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호록거리며 엎어진 오인하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적당히 식은 커피는 가느다란 김을 피어 올렸고, 이제는 익숙해진 친구의 주접 앞에서 한도윤은 친구의 이마보다 테이블 위에서 덜컹댄 음료를 먼저 살피는 것으로 우정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아니, 그렇잖아. 안 그래?”
“영이 누나가 비러브드 멤버들이랑 같이 크리스마스 캐럴 내는 거?”
오인하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다행히 소리만 요란하고 세게 박은 건 아닌지 핀으로 앞머리를 올려 시원스럽게 드러난 이마는 상처 없이 깨끗했다. 얼굴은 여전히 울상과 죽을상 사이를 오갔지만 주체할 수 없는 긍정적 감정으로 인한 것이지 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걸 알기에 한도윤은 조용히 오인하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가까운 사이라고 무심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상대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니까 속으로 삼, 이, 일, 하고 숫자를 세면,
“아, 물론! 언니는 지금 이대로도 눈부시고 빛나지.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바쁘기도 엄청 바쁘니까 조금 아쉽고 아련해도 그냥 내 마음이 그럴 뿐이지 크게 기대하진 않았단 말야? 근데 그렇게 아쉬움만 곱게 접어 나빌 때 딱, 이게 뜬 거지. 언니도 참,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다고 나한테도 쉬쉬하고. 얼마 전에 언니랑 영상 통화했거든? 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빛이 날 수가 있지. 실환가? 아무튼 크리스마스 선물 다 받았어, 나. 진짜 성공했다. 올해도 잘 살았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
숨은 쉬고 말을 하는 건지 속사포로 터져 나오던 오인하의 간증이 다시금 앓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 한도윤은 옆으로 밀어 놨던 오인하의 컵을 그 앞으로 원상 복귀 시켰고, 오인하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한 후 빨대는 제치고 컵을 들어 음료를 쭉 들이켰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인지 뭔지 유리컵 안에 잔뜩 든 얼음이 서로 부딪쳐 달그락거리며 대화의 인터미션을 알렸다.
“그래도 죽지는 말고. 음원 발매일까지 버텨야 하잖아.”
“당연한 소리 하지 마라, 한도윤. 그날까지 난 불사야. 절대 안 죽어.”
“그래. 컵 조심하고.”
“그래. 컵 잡아줘서 고맙다.”
언뜻 듣기엔 냉랭한 어투와 볼멘 목소리가 오가는 듯하지만 친할수록 스스럼없이 꺼내는 이야기에 계산을 거치지 않은 말을 주고받는 것일 뿐, 둘 사이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사람에 따라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만, 누적된 시간은 가끔 이를 뛰어넘는 소통의 창구가 되기도 했다. 시간의 양과 질 중 양이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경우이리라. 이와 반대로 특수한 상황에 부닥치어 동요된 심리 상태가 본래라면 공개하지 않았을 정보를 털어놓게 하고 교류를 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 그곳이기에 꺼낼 수 있었던 속내가 그러했다.
평범한 날 평범한 장소에선 쉽게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이야기, 그날 그들이 고백한 과거와 묻어둔 진상, 결의는 지금도 때때로 자기 자신을 놀라게 했다. 남에게 말하지 않으리라 결단한 이야기를 어쩌다 저 애가 알게 되었을까? 나는 어쩌다 그걸 말하게 되었을까. 회고하면 그때는 그럴 수 있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 지금이라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잘못된 게 아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과거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도달한 현재였다. 물론 전혀 다른 과거를 거쳤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현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현재는 지금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로 어떤 미래는 완전히 잃었을지라도 그들은 어떤 현재를, 이 순간을 손에 넣었다. 이 역시 다시 미래로 이어질 과거가 될 것을 그들은 알았다. 엔딩 이후의 세상은 세상에 엔딩 따윈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을 그들은 과거에서부터 과거로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이 막학기던가? 아니, 한 학기 더 남았지?”
산 자는 그렇게 나아간다. 산 자는 그럴 수 있는, 산 자에겐 그런 세상이다.
“휴학 한 번 했으니까. 내년 코스모스 졸업.”
죽은 사람에겐 그렇지 못하다.
“시간 빠르네. 오인하가 벌써 졸업이라니.”
“아직 졸업하려면 한 학기 남았다니까. 그래도, 그러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
조금 빠르게 마셔버린 음료가 컵 바닥에서 찰랑거리고 머그잔 바닥에는 시커먼 커피 가루가 눌어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감도는 건 의도치 않게 말을 멈춘 간격이 일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인하의 표정을 본 한도윤이 부러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소리에 공백을 만들어 오인하의 말이 내려설 자리를 내어주었다. 오인하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오인하 뒤로 따로 잡은 약속이 없기에 그가 아주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한도윤의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한도윤은 오인하의 자리에 제가 앉고 제 자리에 오인하가 앉아 있었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바로 묻고 싶은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저를 기다려주었던 날을 기억하기에, 한도윤도 얼마든지 그를 기다릴 수 있다.
“시간 참 빨리 가. 그래서 내년엔 한 번 가보려고. 너랑 언니는 몇 번 갔던 데.”
그가 단숨에 말하고 입을 다문 까닭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일을 최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한도윤은 오인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며 그 말이 언젠가 자신이 듣길 기대한 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인하는 그 셋에 관해선 종종 이야기를 꺼내었으나 그 사람에 관해선 일언반구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따라서 한도윤도 오인하와의 대화 주제로 그 사람을 단상에 올리지 않았다. 필요하지도 않고 나누어 즐겁지도 않은 화제라면 굳이 대화 테이블에 불러올 당위성도 부족하거니와, 마주할 수 있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날 선 형태가 무너져 무딘 문장으로만 남았을지라도 손끝으로 쓰다듬은 글자 아래엔 패인 자국이 여실했다. 고통은 존재 자체가 다시 고통이 되는 악순환을 가진다. 이런 연유로 한도윤은 오인하가 진정 오래 생각한 것을 알아 ‘괜찮겠어?’ 같은 말은 입속에서라도 굴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과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다.
“같이 갈까?”
“나중에 시간 맞으면? 너도 네 할 일 많잖아. 내가 너 곡 마감 직전에 부르면 어쩌려고 공수표를 뿌리려 들어?”
“윽…….”
오인하가 과제로 죽어가던 시기에 곡 마감으로 똑같이 엎어져 있었던 한도윤은 새삼 그 시기를 다시 떠올리자 쓰린 위에 짧게 신음했다. 오인하는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었고 그 바람에 손에 쥐여 있던 컵이 흔들려 달각거렸다. 히터 덕분에 따뜻하지만 조금은 건조한 카페 안에서 그의 청량한 웃음소리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민한 흔적이 없지는 않지만,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꺼내 들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바닥에 가라앉아 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는 한곳에 고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처럼,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이었다. 오인하는.
“혼자 가면 뭐, 혼자 가는 거지. 그래도 말은 고맙네. 괜찮겠어? 같은 말 하면 딱밤 날리려고 했는데.”
“그럴 것 같아서 안 했어.”
“잘했네. 앞으로도 계속 그 눈치로 잘 지내자고. 벌써 몇 년이야? 까마득하다, 진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 가게마다 트는 캐럴이 메들리로 이어지는 밤에 대화는 무르익고 카페 안으로는 경쾌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려 넘어왔다. 한도윤은 꾸준히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무대에 서며 살아온 나날을 오인하와 나눴고, 다시금 제가 지금 이곳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연말을 들뜨게 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한 해를 살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지금을 만끽한다. 그게 오롯한 기쁨은 아니어도 괜찮다. 충만하지 않더라도, 벅차지는 않더라도 괜찮고,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살아있다는 건 살아있음을 느낄 이유로 충분하다. 기쁨을 느낄 이유로도, 슬픔을 느낄 이유로도 그러하기에 산 자인 한도윤은 언제나 그들을 함께 느낄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계속 살아있을 것이고,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12월 밤은 그걸로 괜찮은 밤이고 충분한 밤이다. 그러니 한도윤도 괜찮다.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너도 잘 지내고. 또 보자.”
오인하는 카페를 나와 정류장 두 곳을 지나치고 만난 세 번째 정류장에서 한도윤과 헤어지고 5분여를 기다려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서서 가는 게 싫어서 이 추위에 걸어온 보람 있게 넉넉한 빈자리가 오인하를 환영했고, 오인하는 그중 히터의 힘으로 외풍을 무시할 수 있는 창가 자리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30분은 안내방송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기에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로 한 건 연말다운 행동이었다. 몇 명 되지 않은 승객들은 눈을 감고 고단한 몸에 잠깐의 휴식을 내어주거나 자신의 휴대전화를 조작하고 있어 그의 사색을 방해할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처럼 꽁꽁 싸매지 않은 여름이었을 때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으니, 애당초 그가 잊히는 데는 한도윤만큼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수년 전 카메라 한 번 더 받으면 나쁠 것 없다는 각오를 다졌던 오인하는 어디로 갔는가? 오인하는 작게 웃었다. 어디 가긴, 여전히 여기 있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유필웅을 잊기 위해선 모두가 잠든 사이 눈꺼풀 위에 망각의 즙이라도 발라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나날이 있었다. 허황한 꿈을 꾸다 지쳐 눈을 뜨면 아침이 왔고, 오롯이 오인하만 존재하도록 애쓰던 낮을 넘기면 어슴푸레한 저녁이, 그러다 다시 꿈을 꾸는 새벽이 반복되었다. 세상에 거의 스무 해 동안 존재한 사람을 완벽히 도려내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인하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기회도 잡았다. 방송에 출연하면서 오인하는 아주 유명해졌다. 유필웅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어도 오인하에게서 그를 연상하기는 힘들 정도로 오인하는 달라졌고, 유필웅은 사라졌다.
바라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 바라 마지않은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온, 유필웅. 제가 죽거나 상대가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의 첨단이 아주 날카로워질 때면 유필웅도, 유필웅이었던 오인하도 밤새 잠이 들지 못했다. 안식하지 못한 밤의 가장자리에 제대로 된 낮이 붙을 리 없었다. 절박한 사람은 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급급하고, 처음으로 거둔 승리의 기쁨은 어디로 도망치든 따라오는 편지와 함께 스러졌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그자는 무기형을 선고받지 못했다. 그러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자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쫓아오지 못할 만큼, 감히 내게 손댈 수 없을 만큼. 오인하는 달라져야 했다. 멀어져야 했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신승연이 가리킨 길은 가장 멀리 달려갈 수 있는 올곧은 직선주로처럼 보였다. 신승연은 수로의 주인이었고, 오인하는 그 길을 걷기 위해 금화 한 닢과 같은 자신의 것을 내주어 그와 거래했다. 상호거래였다. 수로를 타고 흐르는 망각의 강이 처음엔 발목에서 찰박였다가 이내 허리, 가슴까지 차올라 점점 숨을 가쁘게 했지만, 오인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을 강하게 소망하면서, 이따금 슬픔과 탄식과 불과 증오가 망각의 지류를 휘어 감아도 이 길이 지름길이라고, 가장 멀리 도망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저를 보는 세상 사람까지 모두 레테 안에 침수되기를 바랐다. 혹 누가 유필웅을 알아본다고 해도 그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만큼 많은 사람의 눈꺼풀 위에 망각의 즙을 바르고 망각의 강에 빠뜨릴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러면 그는 이제 안전할 것 같았고, 괜찮을 것 같았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괜찮을 만큼.
무너진 길의 끝에서 오인하는 멈춰야 했다. 앞은 이제 나아갈 길이 없었으나 뒤에서 재게 달려오는 물살이 이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흐름을 거스르는 그를 채근하듯 다리 위에 제 몸을 부딪친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길 반복하지만, 마지막 순간 오인하도, 그 누구도 더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인하는 천천히 뭍으로 올라가며 지금까지 나아온 거리를 가늠했다. 바란 만큼 멀리 오긴 했으나 이 길의 끝이 제가 바라는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 게 우습기도 하였다. 금화 한 닢의 가치로는 충분한 교훈인가 하면 이젠 거슬러줄 사람도 없고 방향을 지시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누군가는 계속 이곳을 맴돌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돌아가 그곳에 두고 온 것을 찾아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인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멀리 떠나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바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바람이 쉬이 버려지던가. 생각을 한 곳에 가둘 수 있던가. 세상에 스무 해 동안 존재한 사람이 완벽히 도려내지던가.
새삼스러운 고민이 끝났다. 오인하는 다시 걷기로 했다. 계속 걷기로 했다. 오래전 그랬던 것 같이, 오인하는 원래부터 스스로 걷는 사람이었다. 오인하라는 이름을 지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인하였다. 춤을 배우고 무대에 서기로 한 것 역시 오인하 자신이었다.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여 자신이 바라는 곳을 향해 발을 움직이는 건 처음 해보는 낯선 도전이 아니었다. 긴 시간 그는 방황했으나 다시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두렵지만, 겁이 나지만 다시 도전하고 방황하는 그를 막아 세울 수 있는 사람도 어디에도 없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 와선 방황을 도망이라고 납작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여정을 방황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 수년 전 제가 걷고 결국 떠났던 그 길도 누가 일러준 방향대로만 걸었던 것일지라도 자기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처럼 돌아 헤맨 시간도 제가 진정 바라는 것을 알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인정한다. 이전처럼 거부하지 않는다. 수업료로 치른 금화 한 닢은 그가 떠난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겠지만 자신은 이제 거기 멈춰서 있지 않았다. 지나온 길, 이름과 함께 흘러온 시간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추억은 이처럼 미화되기 쉽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인하가 받아들인 것은 기점을 도는 이 버스의 경로 같은 시간 속에서 유필웅을 다시 마주한 날 배운 것들이었다. 자신은 영원히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미움과 두려움도 내려놓지 못하겠지만, 좌절과 괴로움, 절망 사이 유필웅을 두고 오느라 함께 놓고 왔던 유필웅에게도 오인하에게도 좋았던 것들, 최초로 거둔 승리 같은 것들을 오인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바라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와 포기했던 바라 마지않은 것들이 많았다. 유필웅이었을 때 거뒀던 승리같이, 수년 전 무대 위에 직접 서서 무대를 즐기고 빛냈던 자신 같이.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끔찍한 기억들, 꿀렁이는 용서치 못할 죄악으로 인해 그사이 있었던 분명히 좋았던 것들까지, 좋았던 자신까지 없던 거로 치부하고 부정하고 싶은 순간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도 도려낼 수 없다는 것 또한 호되게 배우지 않았나.
그렇기에 필요한 건 정리였다. 생각의 정리. 마음의 정리.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을 위한, 더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위한 정리. 행동하고 나아가기 위해 더는 도려내지 않고 대신 돌아본다. 필요한 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수년간 정리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것에서 자신은 그리할 것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고 바라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면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나아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있나. 그렇기에 모든 도전은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았다. 오인하는 스스로 걷는 사람이고 멈춰 있지 않다. 이름처럼.
오늘 한도윤에게 말한 것은 아마 연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것이다. 연말은 회고하기 좋은 시기다. 그걸로 괜찮고 충분한 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날 선 형태가 무너진 무딘 문장 아래 패인 자국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오인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자신도 고단한 몸에 휴식을 내어주기로 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버스가 신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